p. 37
사람들이 사유하면서 꿈꾸고 꿈꾸면서 사유하던 시절, 촛불은 영혼의 고요를 재는 압력계일 수 있었고, 결이 고운 평온, 삶의 세세한 부분들까지 스며드는 평온 ― 평화로운 몽상의 흐름을 따라 흐르는 시간에 연속성의 은총을 베푸는 평온 ― 의 척도일 수 있었다.
평온해지고 싶은가? 조용히 빛의 작업을 수행하는 가벼운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쉬어보라.
p. 89
고독자의 책상 위에 놓인 촛불은 수직성의 온갖 몽상을 준비한다. 불꽃은 굳세고도 취약한 수직선이다. 숨결 하나에도 흐트러지지만 금방 다시 일어선다. 상승하는 힘이 그의 위신을 회복시켜준다.
p. 89~90
불꽃은 살아 있는 수직이다. 불꽃 몽상가라면 누구나 불꽃이 살아 있음을 안다. 불꽃은 예민한 반응으로 자신의 수직성을 보호한다. 연소에 문제가 생겨 수직 정점의 도약이 방해를 받으면 불꽃은 즉각 반응한다. 불꽃 앞에서 수직화의 의지를 배우는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높이 타올라,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정점까지 가겠다는 의지를 되찾는다.
p. 90~91
그렇다, 불꽃의 줄기는 아주 곧고 아주 가냘파서, 불꽃은 한 송이 꽃이다.
이처럼 이미지와 사물은 자신들의 기운을 주고받는다. 불꽃 몽상가의 방 전체가 수직성의 분위기를 받는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역동성이 꿈들을 그 정점으로 이끈다. 우리는 심지를 감싸고 도는 내밀한 소용돌이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고, 불꽃의 뱃속에서 어둠과 빛이 싸우는 소란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불꽃 몽상가는 자신의 꿈을 정점으로 상승시킨다. 거기서 불은 빛이 된다.
p. 102
종종 우리 할머니는 검은 벽난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연기를, 껍질 벗긴 삼대로 능숙하게 불꽃 위로 다시 피우시곤 했다. 게으른 불은 늘 나무의 모든 정수를 단숨에 태워버리지 않는다. 연기는 빛나는 불꽃을 마지못해 떠나간다. 그 불꽃에겐 아직 태워야 할 것이 많았다. 인생에도 다시 불붙여야 할 것이 많지 않은가!
p. 116~117
나무는 자기 존재의 가장 값진 것을 빛을 향해 올려 보내며, 그래서 많은 시에서 과실 달린 나무는 램프 달린 나무이다. 이 이미지는 정원들의 시에서 너무나 자연스럽다. 여름철 무성한 나뭇잎 속의 모든 빛은 불의 양식이다. 디킨스의 작중인물 중 한 명은 자신이 어렸을 때 “새들의 눈이 빛나는 이유가 반짝이는 붉은 열매를 먹기 때문”인 줄로 알았다고 고백한다.
p. 135~136
말의 몽상가인 나에게 전구라는 말은 참으로 우습다. 전구는 절대로 소유형용사를 붙일 만큼 친숙해질 수 없다. 오늘날 과연 어떤 사람이, 예전에 사람들이 ‘나의 램프’라고 말하듯 ‘나의 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우리가 우리의 물건들과 함께 보낸 나날을 그토록 힘차게 말해주던 그 형용사들, 그 소유형용사들이 쇠망해버린 지금, 어떻게 아직 꿈꿀 수 있단 말인가?
p. 141
사물에게 품성을 부여해보라. 진심으로 그 활동적인 존재들에게 그들이 누려 마땅한 권능을 부여해보라. 그러면 온 우주가 찬란하게 빛난다. 좋은 램프, 좋은 심지, 좋은 기름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빛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불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기름을 좋아한다. 그는 이 세계의 물건 하나하나가 저마다 세계의 싹이 되는 그런 우주생성론의 몽상들에 경도된다. 노발리스 같은 몽상가에게 기름은 빛의 질료 그 자체요, 아름다운 노란 기름은 응축된 빛, 팽창되고 싶어하는 응축된 빛이다. 질료 속에 갇혀 있는 그 빛의 힘을 인간이 다가와 가벼운 불꽃으로 해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