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조건, 심리·정서 상태, 가정 환경, 학교 환경, 지역 환경, 개인의 강점과 욕구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한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복지는 언제나 맞춤형이고 통합적일 수밖에 없다. (……)
이 글을 읽으며 불편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교사의 한계가, 어떤 장면에서는 보호자의 선택이, 또 어떤 장면에서는 제도의 빈틈이 드러난다. 이 책은 그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다만 그 불편감이 개인을 향한 비난으로 멈추지 않고, 구조를 함께 바라보는 질문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가 잘못했는가”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붙들어 주기를 부탁한다. 그 질문에서부터, 이 책의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 〈읽기 안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17쪽
“용돈은 받아 본 적 없어요. 그냥 교통비 정도만 받아요.”
“필요할 때 달라고 하는데, 아껴서 스터디 카페에 가요. 집에는 제가 공부할 공간이 없거든요. 저녁은 거의 먹지 않아요.”
“친구들이 뭐 먹으러 가자고 하면 그냥 빠져요. 마라탕이나 떡볶이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해요. 그게 편해요.”
실제로 우리가 만난 청소년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생계유지가 위태로운 가정에서는 최소한의 금전적 지원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악순환은 청소년 삶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은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어려워진다. 소질과 적성을 발견하더라도 가정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 성취를 통해 자신을 긍정해 본 경험이 적다. 학교에서 늘 주목받는 자리는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의 몫이 된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은 점점 위축되고 설 자리를 잃는다. 학교에 가기 싫어지고,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으며, 우울과 무기력이 찾아온다.
— 〈1장 교육복지 현장 보고서〉, 30~31쪽
교육복지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청소년을 만나며 양육자, 교사, 지역사회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뿐이다.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라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 ‘양육을 당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취급된다. 그들의 자기결정권, 자기 주도적인 삶은 전혀 존중되지 않는다. 청소년에게 묻고, 듣고, 그에 맞게 응답해야 한다. 그러면 사건이 터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
아무리 적극적인 사후 개입이 이루어지더라도 당사자가 존중받지 못하면 이들은 부정적으로 반응하거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때로는 모든 지원 자체를 거부해 버린다. 지원이 오히려 또 다른 통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청소년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 〈2장 생존의 기록, 결석의 재해석〉, 49~50쪽
산들바람은 이미 지역아동센터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습 때문에 무척 바쁜 일상을 보냈다. 부모가 생존해 있지만 모에게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고 그들이 직접 양육하지 않는 점 등을 살폈을 때, 산들바람에게는 정서적 안정을 주는 관계와 학교 온라인 수업에 원활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옆에서 살피고 돕는 역할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조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영어를 잘하면 다 해결돼요. 공부만 잘하면 다 해결될 거예요.” 그들은 산들바람에게 다른 것보다 학습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 〈3장 동상이몽, 그 엇갈린 시선〉, 58쪽
청소년과 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족이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도 청소년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되거나 이해받지 못한다.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도 풀어내려는 방향이 다르니 더 꼬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 존재로서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향을 찾고 고민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 청소년 시기에서 신체와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아 가고자 한다. 이 시기를 그저 누구나 겪는, 짜증 내고 반항하는 ‘사춘기’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청소년과 영원히 대화할 수 없다. 청소년 스스로도 자신이 왜 화가 나고, 무엇이 고민이고, 어떤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 모를 수 있다. 더구나 겉으로 하게 되는 말과 진짜 속마음의 이야기는 다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누가 청소년과 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을 걸고 그들과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지금 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청소년에게 사람, 공간, 시간, 기회, 선택지를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사람이다. 청소년 곁에 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모든 것을 가른다.
— 〈3장 동상이몽, 그 엇갈린 시선〉, 71~72쪽
청소년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학교에 방문할 때면 청소년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병원, 심리 상담실, 대안학교 등을 떠올린다면 청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청소년은 과연 치료의 대상일까. 혹은 다른 곳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존재일까. 혹은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에 불과할까. 이 지점에서 때때로 한국 교육의 현실을 탓하거나 분노하게 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일만은 아니다. 단지 현재 공교육에서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에 접근하거나 복잡한 상황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안이 없을 뿐이다.
— 〈4장 살아 있게 하는 힘, 사람〉, 86쪽
지금 청소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다 보면 ‘청소년과 대화하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종착지에 도달한다. 청소년에게 말을 건네고, 질문하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 양육자는 경제 활동 등의 이유로 시간적·정서적 여유가 없다. 교사는 학습과 관련된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 외에 그 영역을 확장할 여력이 없다. 지역 기관에 어린이·청소년 지원 기관들이 있기도 하지만 프로그램이나 사업 위주로 운영된다. 결국 청소년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삶의 과정을 함께하며 지켜보고 지지할 사람이 없다.
— 〈4장 살아 있게 하는 힘, 사람〉, 93쪽
이런저런 이유들로 교육복지는 해마다 학교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영역이 되어 있다. 일반학교 교사와 교육복지 관련 회의를 하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할 때, 어쩔 수 없이 담당을 맡게 되었다는 교사들의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 여과 없이 느껴진다. 실제로 휴직 후 돌아온 교사, 그해에 처음 부임한 신입 교사, 심지어는 계약직 교사가 교육복지 담당 교사로 배치되는 학교를 여럿 보았다. 기존 교사들이 다른 업무를 선점하여 선택권 없이 교육복지를 떠맡게 된 분들이다. 아주 소규모 학교의 경우 교육복지 업무를 맡을 교사가 없어서 교감 선생님이 담당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매년 학기 초마다 반복되며, 그때마다 우리는 교사들에게 교육복지를 맡아 주셔서 감사하고, ‘교육복지라서 죄송하다’라는 말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교육복지가 교사들에게 기피 영역이기는 하지만, 교사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진행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우선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교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며 첫 시작을 열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과 교사를 돕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학교 안에서 교육복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 〈5장 깊은 이해와 연대의 영역〉, 101~102쪽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아요. 학교에는 오지도 않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심으로 청소년의 생사와 안전을 걱정하는 교사의 눈빛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교사에게 건넨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선생님 같은 한 분이 계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변함없이 꾸준히 연락해 주세요. 응답이 오지 않아도 전화와 메시지를 꾸준히 시도해 주세요. 등교 문제나 자해 이슈 등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화제를 전환하면서 안부를 물어 주세요. ‘오늘 아침에는 부쩍 날이 쌀쌀하더라.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니?’ 등으로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이 말을 듣는 내내 눈동자를 마주치며 아무 말 없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래도 제가 잘하고 있었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분이 학교에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5장 깊은 이해와 연대의 영역〉, 114~115쪽
교육복지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난해한 상황은 양육자가 청소년이 받을 수 있는 지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때이다. ‘보호자 비동의 사례’라고 이름하자. 청소년에게 어떤 일이든 위기 상황이 발생했는데 보호자의 거부로 지원이 불가한 경우가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몇 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꽤 잦은 빈도로 마주할 만큼 많다. 사실 이런 케이스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학교와 지역교육복지센터 또는 어린이·청소년 지원 기관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 〈6장 잊고 지내는 당연한 것의 부재〉, 129~130쪽
“청소년을 어떻게 지원할까?”라는 물음은 결국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과 같다. 관계가 끊어져도 다시 이어 줄 수 있는 사회, 고립된 한 청소년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 목소리를 잃은 청소년에게 “너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회.
청소년은 죽음을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삶을 시도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 기회를 지켜 내는 것이다. 관계의 단절 속에서 청소년은 고립되지만, 누군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을 때 이들은 다시 연결된다. 학교와 복지, 의료, 지역사회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청소년의 생존을 지켜 낼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청소년을 지킨다는 것은 제도를 고치는 일이자, 동시에 사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 〈에필로그: 포기할 수 없는 이유〉, 173~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