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댕의 ‘가격 혁명’은 신대륙 은의 범람으로 커진 화폐량에 정치가 만든 왜곡이 겹치면서 생긴 오랜 인플레이션을 뜻한다. 그리고 그는 그 해법 역시 정치의 설계(정직한 화폐와 열린 시장)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권력이 주조 이익을 챙기는 원리는 같다. 발행권을 쥔 쪽이 동전의 실제 가치를 살짝 깎으면서 당장 재정을 채우면, 그 비용은 나중에 물가 상승과 교환 질서의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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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C는 이론적으로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결제 지연을 없애 국민의 금융 편익을 높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제 설계 과정의 우선순위는 국민의 총비용 최소화가 아닌 정부의 세수 관리 효율성과 금융기관의 통제력 유지에 놓여 있다. 정부는 모든 자금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세원 포착의 사각지대를 없애려 하고,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의 영향력을 개인의 지갑 깊숙한 곳까지 직접 관철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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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정부가 돈을 찍는다”라고 말하지만, 제도와 회계를 따라가 보면 ‘실제’로 통화를 만들어 내는 주체는 연준이다. 여기서 말하는 돈은 일상에서 쓰는 지폐뿐 아니라 은행들이 연준에 예치해 두는 전자적 예금, 즉 지급준비금까지 포함한 기초통화다. 지폐는 내가 손에 쥐는 종이돈, 지급준비금은 은행이 중앙은행에 가진 예금이다. 두 가지를 합친 것이 연준의 부채이자 경제의 바닥자금이다. 이 기초통화를 늘리고 줄이는 스위치를 쥔 곳이 바로 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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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인플레이션세(물가 상승으로 인한 가치 하락), 각종 수수료, 이자 부담, 그리고 송금할 때마다 기다려야 하는 정산 대기 시간까지, 이 보이지 않는 비용들이 우리 생활 곳곳에서 불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 틈을 빅테크 기업들이 기술이라는 지렛대로 파고들었다. “돈을 덜 내게 해주고, 더 빨리 받게 해주고, 복잡한 절차를 없애주겠다.” 이 약속은 흩어져 있던 사용자들을 거대한 편으로 조직했고, 정부-중앙은행-시중은행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삼각동맹’의 수익을 조금씩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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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과 암호자산, 디지털 화폐 실험은 제재와 집행, 은행 네트워크 축소, 온·오프램프 규율 강화에 부딪혔고, 동시에 ETF·토큰화·인가 스테이블코인 같은 제도권 포맷이 열리며 ‘정문’을 통과한 이익은 월가 장부로 이동했다. 이 과정을 보는 빅테크는 좌파 행정부와 규제기관, 연준과 월가가 하나의 연쇄로 연결되어 혁신의 속도를 늦추고, 평가기관과 보조금 체계, 거버넌스 규범을 통해 산업의 승자를 정책적으로 정한다고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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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준비금에 RWA를 편입하면, 준비금이 단순히 안전자산 보관소에서 온체인 담보물로 진화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 잔액은 토큰화된 국채, 상업어음, 무역금융 자산 등과 직결되고, 거기서 발생한 이자가 자동으로 사용자에게 분배될 수 있다. 그 구조는 사실상 인플레이션세를 상쇄하는 새로운 통로가 된다. 지금까지 준비금 이자는 발행사와 월가가 가져갔지만, RWA 기반 구조는 사용자에게 이자를 돌려주도록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이는 “스테이블코인=무이자 디지털 현금”이라는 인식에서 “스테이블코인=온체인 예금형 자산”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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