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는 사람이 숨을 쉬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돈이 이렇게 많다는 걸 몰랐다.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 출신 아빠가 간신히 혼자 먹고살 정도로 버는 돈으로 둘이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간단한 계산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프거나 해고당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되는 순간 안전장치 없는 삶은 곧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추락하며 영리는 알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이란 당연한 일이 아닌 축복이고, 축복에는 저마다 가격표가 있다는 것을. - 43쪽
둘은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초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뭐?”
“너 지금 하는 거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해?”
영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이미 여러 번 물은 것이었으니까.
“예전처럼, 그리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데 평범하게 산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이더라고.”
집안이 물속처럼 고요해졌다. 공기조차 둘의 말을 숨죽여 듣는 듯했다. - 100쪽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것은 초롬의 부계정이 아니었다. 계정을 만든 것도, 몰래 찍은 초롬의 사진을 올린 것도 전부 민들레였다. 팔로워들의 환호가 초롬이 아닌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순간, 민들레는 비로소 살아 있는 기분을 느꼈다. 가짜라도 좋았다. 하트 하나가 한 번 더 미소 짓게 했다. 영혼이 빈곤해질 때마다 민들레는 그렇게 온라인 셀프 숭배로 수혈을 하곤 했다.
민들레가 핸드폰을 닫고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는 헤어핀 금속 틀을 교실 시멘트 바닥에 썩썩 소리가 나도록 갈기 시작했다. 칼처럼 날카로운 핀이 언젠가 초롬의 모찌 같은 피부에 붉은 상처를 내주길 바라면서. 조용한 교실 구석에서 신경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한동안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 106쪽
함초롬은 명실상부 국내 1위 식품회사다. 송나희 회장의 성공 신화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윤 관장에게는 그저 수라간 무수리 같은 존재였다. 바닥부터 아득바득 올라온 사람이 싫었다. 근본이 다른 사람이 주제넘게 구는 건 더더욱 싫었다. 윤 관장 특유의 말투는 왕자를 엄히 훈육하는 사극 속 중전 같았다. 콕 선생 앞인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콕 선생을 소개해 준 한 그룹 사모는 콕 선생이 학생이나 그 집안의 사생활에는 전혀 관심 없다고, 듣는 대로 모두 흘려보낸다고 했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맡은 학생의 합격과 성공보수뿐이라고, 진정 최고의 과외 선생이자 코치라고 칭송했다. - 115쪽
영리가 핸드폰의 고양이 인형을 움켜쥐었다. 다경이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무 좋아. 네 모든 걸 닮고 싶어.”
다경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경을 돕겠다고 했던 모든 행동이 도리어 다경의 마음에 욕망을 심은 것은 아니었을까. 잘난 친구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을. 다경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그 일을 신고한 자신일지도 몰랐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였을지 이제 영리는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졌다. 거짓의 한복 판에 서 있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다경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걸지도 몰랐다. 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 182쪽~183쪽
“비서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래.”
“왜 그렇게까지 회장님한테 충성하세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가요. 가끔은 막 대하기도 하잖아요.”
공 비서가 창밖의 땅거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인연은 길든 짧든 다 시절 인연이야.”
시절 인연. 영리는 그 말을 낮게 읊조렸다.
“난 그저 회장님과의 시절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다. 언젠가 우리의 시절도 끝나겠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공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영리는 이미 지나간 인연과 아직 끝나지 않은 인연을 떠올렸다. 초롬도, 송 회장도 언젠가는 끝날 시절 인연일 것이다. 그리고 아빠도. - 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