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선내의 구석구석, 제각기 다른 유형의 어리석음이 가득하다. 희극적이라기보다는 음울한 연극이다. 서로 속고 속이는 이들, 무지와 탐욕, 쾌락과 허위의 향연 속에서 모두는 자신을 현명하다고 믿지만, 실상은 모두 어둠에 길을 잃은 자들일 뿐이다. 배는 계속 나아간다. 어디로,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짙은 안개와 검은 물결, 뒤엉킨 고함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꼬여 드는 기묘한 인연들만이 끝없이 반복될 뿐.
--- 「프롤로그」 중에서
늙어서도 악행을 고집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키며, 전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신이 보시기에 극히 흉측하다. 무덤 문턱에 다가선 지금, 한 발은 이미 구덩이에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이들은 지나온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죄를 자랑스레 떠벌리며, 젊은 세대를 유혹하여 부정한 삶으로 이끈다. 이는 세대를 타락시키고 온전한 삶의 질서를 해치는, 악마의 미끼가 된 꼴이다.
--- 「다섯 번째 바보 ‘나이 들수록 어리석음을 키워가는 늙은이’」 중에서
한때 세상에는 굳건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던 고결한 영혼들이 있었다. 그리스에선 많은 이들이 불굴의 충성과 서로를 위한 희생으로 빛나는 역사를 써나갔다. 문헌에 기록된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우정,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의 연대, 다모나스(혹은 다몬)와 피디아스(혹은 피티아스)의 우정, 라엘리우스와 스키피오의 우정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귀한 이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처럼 깨끗하고도 충실한 우정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에 서식한 잔혹함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탐욕 때문이다. 벗을 구하는 대신 돈이나 권력을 최우선에 두고, 친교보다는 경쟁과 배신을 일삼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인간관계는 표면적이고 이기적인 이해관계로 변질되었고, 진실한 우정은 설 자리를 잃었다.
--- 「열 번째 바보 ‘우정과 친교를 스스로 끊어내는 자’」 중에서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도시와 명망 높은 가문들이 술과 탐식, 음란함으로 인해 무너져 갔다. 뛰어난 장수나 제왕이라고 해도 술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토미리스의 아들이 키루스에게 패배한 배경에도 술로 인한 어리석음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조차도 술에 취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죽였다. 어느 날은 체스 시합에서 이긴 부하를 술김에 처형하려 했으나, 부하가 기지를 발휘하여 “술이 깨신 뒤 폐하에게 호소하겠다”라고 말해 살아났을 정도다. 만취한 상황에서 내린 어리석은 결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겠는가?
--- 「열여섯 번째 바보 ‘탐식과 주정으로 파멸하는 자’」 중에서
행운은 변덕스러운 표정과 흐린 눈으로 잠시 너를 품어주다가도, 불안정한 수레바퀴를 굴려 너를 불행과 손해, 재앙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다룬다. 때로는 비열함을 높이 띄워주고, 무고한 자를 저버린다. 그러니 포르투나에게 사로잡힌 자는 이성이 결핍된 바보일 뿐이다. 그는 늘 변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거기서 영원한 안정감이라도 누릴 듯이 착각한다.
--- 「스물세 번째 바보 ‘순간의 행운에 취해 영원한 불행을 부르는 자’」 중에서
여기 분노하는 자들이여, 이리로 와서 우리 바보들의 배에 탈 자리가 있는지 찾아보라. 광포한 성질을 식히려면 느린 나귀 등에 올라타라. 이처럼 작은 불편에도 과도한 분노를 터뜨리는 미친 짓을 멈추라. 종종 무력함이 잔혹함을 막아주듯, 신께서는 사나운 소에게 짧은 뿔을 주시어, 우리 무절제한 분노를 제약하신다.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분노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다.
--- 「서른다섯 번째 바보 ‘사소한 일에 크게 노하는 자’」 중에서
옛말에 이르길, 어머니의 충고를 듣지 않으면 결국 계모의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의 계명을 경시하면 궁극적으로 큰 고통과 수치에 직면하게 된다. 성경과 고대 시인들은 수없이 많은 예를 들어 이를 경고한다. 파에톤이 신의 권능에 도전하다 불에 타 죽었고, 이카로스가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어기고 너무 높이 날다 추락하여 죽었다. 이런 사례는 모두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매일 다른 이들의 실패를 보면서도, 그러한 경고를 헛되이 흘려보낸다.
--- 「서른아홉 번째 바보 ‘남의 불행을 보고도 교훈 삼지 않는 자’」 중에서
부모나 어른이란, 본래 훌륭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아이들이 선량한 길로 나아가게 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어리석은 아버지나 어머니는 스스로 무절제한 삶을 살면서, 아이들에게 “방탕한 삶”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지면, 아들도 도박을 배운다. 아버지가 부정하고 악한 행위를 자행하면, 아이도 그러한 삶을 답습하게 된다. 집안의 질서와 품격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내와 자녀, 하인들까지도 모두 그릇된 길을 좇는다. 말하자면 늙은 수탉이 뒤틀린 소리를 내면, 어린 수탉도 그 소리에 맞춰 음습하게 울게 되는 것과 같다.
--- 「마흔여섯 번째 바보 ‘어른들의 나쁜 본을 그대로 좇는 아이들’」 중에서
역사와 다수의 책을 보면, 도시나 국가가 그들에게 이익과 영예를 가져다준 이들에게 배은망덕하게 굴다가 망한 예가 많다. 로마는 카밀루스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를 추방했다. 그는 로마의 명예를 지키려 애썼는데도 말이다. 아테네 또한 그러했다. 솔론은 아테네의 조야한 관습을 다듬고 정의로운 법률을 세웠지만, 아테네는 그를 쫓아냈다. 스파르타는 폴리스를 개혁한 리쿠르고스를, 로마는 조국을 위해 봉사한 스키피오를 냉혹하게 대했다. 이들 도시와 국가의 공통점은 큰 선행에 대해 배은망덕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결국 아무도 이를 통해 영원한 이득을 얻지 못했다.
--- 「쉰여섯 번째 바보 ‘은혜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한 자’」 중에서
이제 낡은 나무부두에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되짚으면, 의문은 여전하나 최소한 한 가지 확신은 든다. 바보들의 배가 남긴 자국은 세차게 닦아내려 해도 쉽게 희미해지지 않지만, 그 흔적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이 낯선 내일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불안정한 인간사 속에서 가능한 유일한 해답은 결국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배를 타지 않기로 결정하며, 이 굴레를 조용히 끊어내는 것. 바로 그것만이 해답이라는 확신이 든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바다는 흔들린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닻을 들어 올릴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묵직한 결연함이 깃든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