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한 학생이 찾아와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그 시에 나온 문장으로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고백했어요.”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반색했다. “정말? 멋지다! 선생님이 그런 고백을 받았다면 진짜 감동했을 거야!” 얼굴이 발그레해진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는 이제 알겠구나, 하나의 비유가 복잡한 감정을 단숨에 전달하기도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시를 이용해 주기를. 시가 너의 말이 되고 그 말이 누군가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 23쪽
마음공부라는 것은 그 결과가 가시적으로 바로 드러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뤄지거나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 늘 마음을 부대끼며 살고 있다. 내 마음을 잘 알게 되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더 잘 보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더 잘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내가 원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 51쪽
때로는 학생들이 나보다 더 진심이고 더 깊이 알아서 나에게 설명해 주기도 한다. 내가 집중해서 경청하는 모습에 더욱 힘을 받아 더 열심히 설명해준다. 그럴 때면 우리는 서로의 지적 호기심을 건드려주는 사이라는 생각도 든다. 빨간 동그라미가 없는 공부, 궁금해서 찾아봤고 읽어봤더니 궁금증이 풀리는 공부, 그러다 보니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는 공부. 무한 확장의 공부를 학생들과 하고 있다. - 86쪽
그 사이에서 영원히 옴짝달싹 못 할 것 같던 어느 날, 무수한 반복이 기본값인 일에 학교 밖의 경험을 데려와 새로움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간 ‘오래 해왔고 잘하는 것’을 떠올려보니 고민의 여지 없이 배낭여행이었다. 스마트폰도 사전예약 시스템도 없던 2001년부터 줄곧 해외 배낭여행을 해왔지 않던가! 당시 특수교육 대상자를 위한 방과후 미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랜 배낭여행 경험을 활용해 아이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해주자 싶었다. -101쪽
나는 종종 노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노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공부일지는 몰라도, 수십 년 뒤가 흐른 뒤에도 나는 책을 집어들며 공부에 호기심과 흥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사를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희랍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AI 같은 새로운 기술에 흥미를 갖고 있을 수도 있고, 죽기 전에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싶을 수도 있다. 혹은 그 시대에 필요한 조경 기술이나 도자기 빚는 법을 연마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 136~137쪽
반역자가 되지 않을 방법은 공부뿐이다. 나의 공부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언어의 우물’을 채우는 것이 그 첫 번째, ‘번역가의 무기고’를 늘 반짝반짝하게 정비하는 것이 두 번째다. 먼저, 언어의 우물을 채우려면 끝없이 읽어야 한다. 번역 공부의 기본은 단연코 독서다.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번역가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도 남의 글을 열심히 읽어보지 않고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149쪽
남들이 보기에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별것 아닌 것들까지 나는 규칙을 지키고, 한번 하기로 했으면 그 말을 꼭 지켰다. ‘내가 하기로 한 것은 해야지.’ ‘나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게 가장 가치 있지.’라는 생각은 미루고 싶은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을 만날 때마다 유혹을 뿌리치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런 성격 덕인지 성적이 꽤 좋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이공계 대학이라는 KAIST에 진학했다.- 170쪽
졸업을 못 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영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내 것이 되어갔다. 교수님의 말을 이해하고 책을 읽는 속도가 늘었고, 공부 방식도 점점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영어 듣기 실력도 늘었다. 암기가 아닌 ‘듣고 이해하기’로 전환된 것이다. 그 경험은 내게 ‘꾸준히 하면 반드시 어제보다는 나아진다’는 또 다른 교훈을 주었다. -192쪽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린 것 같았다. 시험은 1년에 한 번만 볼 수 있기에, 자격증을 따고 졸업한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머릿속에는 테트리스 게임의 ‘Game Over’라는 글자가 둥둥 떠다녔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함께 공부한 사람 중에 나만 필기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혼자 뒤처진 것 같고, 초라한 기분에 숨고 싶었다. 엉엉 울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상담사는 저 멀리 떨어진 단어 같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학비만 축낸 기분까지 들었다. - 234쪽
내가 맡은 일을 통해 배우며 외부에서 사례 스터디를 하다 보니 똑똑 박사가 되는 것 같았다. 생성형 AI에 질문을 던지면 척척 대답이 나오는 것처럼, 이제 웬만한 인사 관련 질문이 나오면 나도 술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직업인으로서 내 안에 재료와 소재가 많아졌다는 자각은 나를 새로운 갈증으로 이끌었다. 바로 구조와 이론이었다. 이제 HR 케이스를 많이 아는 어엿한 실무 전문가가 된 듯했지만, 인사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학문적 토대와 구조는 뿌연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른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244쪽
그러다가 22번째 도전에서 기적처럼 카카오로부터 승인 메일을 받았다. 직장인으로만 살아왔던 내가 카카오 이모티콘 작가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한 걸음 더 내딛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265쪽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공부는 한 번도 성적표 위에만 있었던 적이 없다. 공부는 늘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었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언어였으며, 상처를 견디기 위한 거리 두기였다. 일기를 쓰는 일도, 시를 읽는 일도, 요가로 몸을 세우는 일도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나는 시를 공부했지만, 사실은 삶을 공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는 나에게 정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견딜 수 있는 문장을 주었고, 무너지지 않게 버틸 수 있는 여백을 주었다. - 2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