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텃밭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있다. 마음 넓은 자연은 부족한 인간의 시도와 도전을 말없이 받아 준다. 여기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마음껏 펼쳐 보고 잘되지 않아도 허허허 웃으며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욕심을 부리다가 끝내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작은 생명체들에게서 배운다. 텃밭을 찾으면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슴이 설렌다. 내가 키우는 텃밭 식물들이 오히려 나를 키우는 느낌이다. 나를 나로 바라볼 수 있는 곳. 나의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과도 같은 곳.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곳. 아내와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희망의 장소이자 편안한 마음의 고향 같은 곳. 나에게 텃밭은 그런 곳이다.
-11p. 프롤로그 중에서
첫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니, 문득 바오패밀리가 생각난다. 예전에 아이바오, 러바오, 푸바오에게 옥수숫대를 가져가 마주 앉아서 먹는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판다가 대나무 줄기를 먹는 모습과 매우 비슷해서 그들도 금세 따라 하며 옥수숫대 껍질을 깠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대나무와 맛 차이는 나겠지만, 자이언트판다가 옥수수밭 가까이에서 살았다면, 옥수숫대도 까먹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그 단맛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농사 노하우를 자세히 알려 주는 어머니도 계시지 않고, 옥수숫대를 갖고 놀던 푸바오도 곁에 없다. 하지만 어머니와 푸바오를 향한 진한 그리움은 옥수수의 한 알 한 알에 빼곡히 담겨 있다. 그 추억으로 영근 옥수수는 나의 영원한 특별 간식이 될 것이다.
-21~22p. 보석 같은 옥수수 알 중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보려면 다양한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 나 역시 텃밭 작물과 과일나무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감탄하며 나의 시각과 세상이 넓어지는 걸 경험한다. 그들은 나에게 더 단단한 뿌리가 내리도록 힘을 주는 존재들이다.
호박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을마다 열리는 핼러윈 시즌 때 생긴 일이 떠오른다. 첫째 곰 손녀 푸바오에게 맷돌 호박에 모양을 내서 선물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경계심을 보이며 뒤로 물러나 줄행랑을 치다가 점점 호기심을 보이고 탐색하더니 핼러윈 호박을 끌어안고 놀던 곰 손녀. 가을밤이 되면 어김없이 맷돌 호박을 뭉근하게 끓여 호박죽 한 그릇씩 나눠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36p. 맷돌 호박에 대한 기억 중에서
부추는 베어 먹고 나면 또다시 땅의 기운을 받아 금세 자라난다. 그래서 베어 내는 과정은 다음을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새순을 받아 맛난 부추를 또 먹어 보겠다는 초보 농부의 야심 찬 미래 계획이다. 딱 이 정도의 미래 예측을 하며 계획하고 투자하고 실행하며 먹고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농사일이 만만하다는 건 아니다. 파종과 돌봄과 수확과 다음 씨앗을 준비하는 일들이 계속 이어진다. 뭐 하나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없다. 하지만 천재지변에 의한 것만 빼고, 웬만해선 농작물이 우리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큰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50p. 맛을 부추기는 부추 중에서
첫 완두콩을 수확하는 날! 잘 여문 꼬투리를 따서 껍질을 양쪽으로 열었더니 똥글똥글한 완두콩들이 쪼르르르 얼굴을 내밀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완두콩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뻐, 이뻐, 이뻐!” 하고 감탄사를 쏟아냈다. 아이바오만 보면 저절로 나오는 “이뻐, 이뻐!”를 식물계에서는 완두콩이 처음 들은 게 아닐까 싶다. 완두콩은 자신이 예쁨받는 걸 아는지, 열매를 더 많이 맺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자 이내 걱정이 밀려왔다. 종묘상에서 구매한 완두콩 씨앗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심은 탓이다. 껍질째 쪄 먹고, 완두콩 밥을 해 먹고, 완두콩 백설기도 하고, 주변에 나눠 주고 남은 콩은 냉동 보관했지만, 한 알도 버려지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가 없다. 헐떡이며 겨우 소비한 셈이다.
내가 또 욕심을 부려 ‘적당히’라는 기준을 넘기고 말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적당히’라는 선을 맞출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조금씩 완두콩 씨앗의 양을 줄이면서 ‘적당히’의 선을 깨닫게 되었다.
-86~88p. ‘적당히’를 가르쳐 준 완두콩 중에서
동물들을 돌보는 주키퍼는 똥과 친해져야 한다. 반려동물과 달리 야생 동물은 배설물로 컨디션을 체크하는 건 물론, 여러 가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물원을 방문한 어떤 분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주키퍼님, 이제 똥 안 치우시죠?” 그때 누군가의 눈에는 똥을 치우는 일이 하찮은 일로 보이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동물의 똥은 동물을 살피고 건강을 체크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키퍼라면 배설물을 직접 치우며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배설물의 상태에 따라 먹이의 소화 상태가 어떤지, 장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기생충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출혈 반응이 있지는 않은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문득 바오패밀리의 황금 고구마 똥이 떠오른다. 대나무를 먹기 시작하고부터 고구마 똥을 누는 루이, 후이가 기특할 뿐이다. 그들이 누는 똥을 보고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에 빠지기도 하는 주키퍼의 삶이 고달프기는커녕 행복하다. 어찌 보면 똥을 매개로 동물들과 정보를 주고받고 대화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고라니의 똥을 보고 반가울 수밖에. 고라니가 남긴 신호 같다는 생각과 함께 산에 사는 동물들과 교감하는 일에도 세심해져 보자 다짐하게 된다.
-167~168p. 이제 똥 안 치우시죠? 중에서
텃밭을 가꾸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소작농으로서 육남매를 키우느라 내 몸 닳는 줄 모르고 평생 흙에서 살다 가신 부모님, 가난과 행복은 별개라며 없이 살아도 서로 도우며 성장한 끈끈한 형제자매, 자연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감동과 감사는 늘 겸손하게 나를 이끌어 준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고, 존재의 크고 작음을 떠나 서로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간다. 동물원의 바오패밀리도, 텃밭을 오가는 숲속 동물들이나 곤충들도 나의 손길이 백 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감사하게도 서로 적응하며 잘 지내고 있다. 텃밭의 작물은 또 어떠한가. 내가 바라던 그 이상으로 잘 자라 아내의 손을 통해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식탁에 올라오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67p.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