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다음 문장을 이끌어 줄 도시를 찾는다. 영화는 그 일이 일어날 법한 도시를 비춘다. 음악은 도시라는 ‘신(scene)’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의 감각에 집중한다. 화가가 사는 도시는 자연스레 그의 붓끝으로 살아난다. 독자는, 관객은, 작품으로 발이 닿지 못한 도시를 이미 알고 있다. 도시는 그 장소를 거쳐 간 세월과 기억이 층층이 쌓인 거대한 노트이다. -p.5
호퍼의 젊은 날은 재즈시대를 지났다. 대공황과 인플레이션, 금주법이 요동치던 때였지만, 그는 도시 어느 모퉁이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화려할 것 없는 풍경인데도 시선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p.37
1900년대 초 『뉴요커』지의 기자인 재닛 플래너 역시 죽은 뒤에는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누군가 부단히 방어하지 않는다면, 하찮고 볼품없어 보일 많은 생각과 희망을 일생 동안 기록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p.60
파리의 센 강변을 따라 이어진 고서점 거리에 자리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1919년 미국인 실비아 비치가 문을 연 이래로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아지트로 유명해졌다.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등이 들락거리던 유서 깊은 책방이다. -p.73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며 놓쳤던 도시 속에 묻혀 있는 낡은 시간들, 켜켜이 쌓인 스토리를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매끄럽지 않다고 주인마저 외면한다면 그곳의 시간은 그저 영원히 깨지 못하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p.94
브루클린이 예술가들의 동네가 되기까지 폴 오스터의 영향이 컸다.
1980년대의 브루클린은 거칠고 위험한 공업지대였다. 범죄, 낙후,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 가난하던 동네의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끝에서 인물들이 살아났다. 밝은 갈색 벽돌집이 들어선 구석진 거리에서 문학적 고독을 발굴했다 -p.177
자신의 독창성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비운의 천재 에드거 앨런 포의 비틀거림은 거절을 마주하고 상심한 오늘의 작가들에게 말을 건넨다. 인생이 작가에게 레몬을 줄 때, 시고도 씁쓸한 맛을 온전히 감당하며 앞서 걸었던 에드거 앨런 포가 있었다. -p.209
당시 영국에서 물건 팔러 다니는 외판원(Commercial Traveller) 대신 디킨스는 자신을 이야기와 풍경을 수집하는 ‘비상업적 여행자’로 정의하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산업혁명 이후 초기 자본주의의 바람이 몰아친 런던 뒷골목이야말로 무수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장소였다. -p.219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시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꾼이 사라지면, 인류는 그 어린 시절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유년의 꿈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p.234
‘하류 가운데 최하류’로 떨어져서 해방감을 느끼는 소설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시 자신이 느꼈던 것에 충실하게 몸을 던질 용기. 조지 오웰의 시간은 그렇게 채워졌다.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