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철도 4호선
숙제를 마쳤다는 듯
여분의 자세로 앉은 사람들의 헐거워진 몸을
안락의자처럼 받아준다
귀를 찢는 베어링 마찰음이 괴기스럽게 들려도
일용할 쉼을 취한 사람들 안락이라는 듯 앉아있다
전동문이 열리고 닫히며 목적지를 알리자
귓등을 세운 신발들이 나가고 들어온다
피곤을 매단 늦은 귀갓길
휴대폰으로 낯선 시선을 차단한다
식은 밥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
이번 내리실 곳은 으슥한 밤 아홉 시 반역입니다
내리실 방향은 세 시 방향입니다
틈새가 넓으니, 귀중품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에 잃을 것 없다는 듯 귀만 열어 두고 있는 사람들
의자 위에 얹힌 어둠을 돌아보지 않고 객실을 빠져나간다
―「아홉 시 반」
나는 날마다 검정으로 태어난다 명랑한 날은 검정 옷을 입고 검정 걸음을 걷는다 검정 안경을 끼고 검정 햇빛을 본다 그의 출근은 쾌활하고 즐겁다 나의 출근은 자석처럼 그의 등에 딸려 간다 나는 까만 옷을 벗고 파란 의자에 앉아 파란 일을 한다 시급 오천 원의 키보드에 놓인 손가락이 현란해 나는 인공 눈물을 넣고 가짜 눈물을 흘린다 빨간 꽃 있습니다 노란 스카프 있습니다 초록색 백팩도 있습니다 초록과 백색은 가장 아끼는 마음입니다 나는 검정에서 하나씩 하나씩 색을 꺼내 진열한다 보라색 오로라도 있나요? 하고 묻는 고객에게는 드문 일이라서 여행을 권한다 여기 캐리어도 있습니다 나는 캐리어에 착착 접히는 상상을 하다가 네모로 된 저녁에 도착한다 네모의 집 네모의 화장실 네모의 실내가 익숙해서 다시 검정으로 들어가 까만 책을 보고 까만 차를 마시고 까맣게 잠을 잔다
―「자화상」
언덕엔 언제나 발목이 젖어 있는 물풀이 있다
그곳은 스쳐가는 바람이 있고
생기로 방글거리는 바람나무가 있다
부레옥잠이 엽병을 부풀린다
물속에 비친 제 얼굴을 입질하는 황새
수면을 쥐고 있는 소금쟁이
물방개는 숨기 위해 계속 파문을 일으킨다
그곳은 오래된 얼굴
풀이 웃자란 연못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햇빛에 달구어진 풀숲은 그늘이 촘촘하고
가두어진 물은 고요하다
딱딱한 골짜기를 쪼는 딱따구리
수면의 심장이 조금씩 흔들린다
심심한 개암나무가 그 위로 열매를 던지고 있다
―「연못」
바닥을 물들이는 저 낙엽 좀 봐
바닥에 꽂힌 저 노랑나비 떼 좀 봐
디카도 좋고
아날로그도 좋을,
울긋불긋 물든 그대 얼굴
따뜻한 전구색으로 한 장
찰칵,
―「바닥에 핀을 꽂은 저 노랑나비 떼 좀 봐」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응달에 갇힌 구석이
연둣빛 꽃대를 민다
꽃대의 붉음이 마당을 흔들자
놀란 허공이 응달을 걷어낸다
―「응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