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단비는 이런 사람이었다. 대뜸 자신의 비극에 취하기 어려운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늘 침착하게 최선을 다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방도를 찾는 사람.
그리고 오늘 아침,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끝낸 다음,
마침내 자기 집 거실 창의 두툼한 암막 커튼을 홱 열어젖혔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은 탄식과 함께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보인다. 여전히, 보여.
저 빌어먹을 뱀이, 어제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온갖 사람들의 목덜미에 칭칭 감겨 꿈틀대는 커다란 뱀들.
절대로 현실일 리 없는 환각.
의심할 바 없이, 나는 결국 미쳐버렸구나.
내 엄마처럼.
- 박새봄, 〈뭘 좀 보게 된 홍단비〉 중에서
“내 이야기를 남이 듣고 뭐라고 쓸지 그게 참 궁금해요.”
“이 책은 경자 님이 메인 작가고 저는 보조 작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어떤 땐 제가 독자나 시청자가 될 수도 있고요. 저는 보고 들은 걸 가지고 잘 써보겠습니다.”
그날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달 남짓 수진은 경자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 인터뷰를 했다. 만나면 보통 두 시간에서 길게는 네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다. 경자가 생생하게 재연해주는 작은 에피소드부터 어렵게 털어놓는 강렬한 사건까지 그 모든 것이 녹음 파일로 남았다. 여러 시간대를 오가며 경자는 4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그리기도 했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들을 끄집어내려 애쓰는 얼굴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녹음 파일에는 웃음과 눈물, 조용한 침묵과 회한이 고스란히 쌓여갔고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수진은 의도대로 반응하는 관객처럼 경자의 목소리와 표정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 박현진, 〈더블 캐스팅〉 중에서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은 저보다 하루 앞서서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거예요?”
“글쎄요, 보이기는 그렇습니다.”
이 정체 모를 도플갱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수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유사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늘 하루 전의 날짜에서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루 전의 세계.
점점 이 일은 수현의 생각보다 복잡해지고 있었다. 수현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이건 이 세계의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혹시 무슨 시간여행 같은 건가요?”
- 박현주, 〈평행선 서점의 방명록 — 1. 하루 전의 세계〉 중에서
로잘린은 이곳의 권태로운 일상이 지겹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살에서 납치로 이어지는 나의 입사 스토리에 언제나 눈빛을 반짝였다. 살면서 내 얘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녀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났다.
“무섭기로는 루돌프가 끄는 썰매에 태워졌을 때가 훨씬 무서웠죠. 꿈에 그리던 삼도천에는 발도 못 담가보고 얼굴에 복면까지 씌워진 채로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과 이러다 죽지도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주 죽을 맛이더라고요.”
우리는 산타파파 물류센터의 사무동 3층에서 함께 근무했다. 로잘린의 등 뒤에서 반짝이는 창문은 마치 커다란 TV 화면 같았다. 그녀는 사무실 뷰가 좋다는 게 이 회사의 유일한 복지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특집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나.
- 이윤정, 〈전지적 루돌프 시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