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의 경계를 유영하는 열네 편의 이야기
김지연 첫 짧은 소설 『꿈 목욕』 출간
2018년 「작정기」로 문단에 등장한 이후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혀온 소설가 김지연의 첫 짧은 소설 『꿈 목욕』이 출간되었다. 그는 익숙한 삶의 장면 속에서 감지되는 낯선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문학동네신인상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을 비롯해 젊은작가상,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현대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에 연이어 수상자로 호명되고 있는 것은 김지연이 동시대 중요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방증이다.
김지연은 『꿈 목욕』에서 꿈과 현실, 기억과 현재를 오가는 열네 편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작품 속에서 꿈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이라기보다 일상에서 문득 감지되는 기억의 흔들림이나 감정을 잇는 매개로 작동한다. 작가는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포착하고, 보통의 세계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순간들을 드러낸다. 여기에 선을 겹겹이 쌓아 올려 완성한 김지혜의 그림이 꿈과 현실의 감각을 아우르며, 작품 속 장면들을 인상적으로 환기하는 동시에 글의 여운을 시각적으로 확장한다.
『꿈 목욕』은 이전 작품들과 문학적 궤를 같이하면서 폭넓은 서사와 형식이 더해져, 소설가 김지연의 다채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이 집약된 이번 짧은 소설은 독자에게 새로운 서사적 깊이와 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두 손을 모아 물을 퍼내 찬찬히 들여다보자 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것은 물만이 아니었다. 내가 밤마다 꾼 꿈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폭포 아래로 헤엄쳐 가서 쏟아지는 꿈들을 온몸으로 받았다. 꿈들에 흠뻑 적셔져 정신을 못 차렸다.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내가 길을 한참이나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실로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_「꿈 목욕」에서
“내가 잊고 잃었던 시간들,
가보지 못한 시간들도 마구마구 뒤섞여 있었다”
또 다른 현실로 존재하는 꿈,
죽음을 통해 되비추는 삶
김지연은 실제 꾼 꿈을 모티프로 한 표제작 「꿈 목욕」을 시작으로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작품들 속에서는 길을 잃은 골목에서 꿈이 스며든 폭포를 맞고(「꿈 목욕」), 휴식차 방문한 호텔에서 반복되는 하루에 갇히며(「맴맴」), 인간이 점차 악어로 변해가는(「나무 아래 악어」) 기이한 사건들이 태연하게 일어난다. 한편 외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막내이모의 출신이 입방아에 오르거나(「모나카」), 죽고 난 뒤 과거의 연인을 따라 산책하며(「산책하는 귀신들」), 빚 문제 때문에 타인의 사인을 멋대로 단정하는(「사인」) 장면들도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에 머물면서 어느 순간 꿈으로 이동했다 되돌아오고, 환상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현실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세계에서 그들은 현재의 자신과 관계를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꿈 목욕』에서 꿈은 비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에게 닿지 않는
관계의 미묘한 간극
이번 짧은 소설에서는 특히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섬세해졌다. 인물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각기 다른 감정의 속도와 기억의 온도를 유지하고, 그 미묘한 어긋남이 관계의 리듬을 형성한다. 작가는 「지금의 날씨」에서 친구들이 SNS 계정주를 자신으로 오해하자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불가해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래? 너였으면 좋았을걸.
마음껏 부정하고 난 다음에 돌아온 대답이 조금 의외여서 그 말은 계속 한솔의 뇌리에 남았다. 한솔은 어째서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그 말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점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니. _「지금의 날씨」에서
나아가 반복되는 꿈을 매개로 현실의 관계를 재감각하는 인물들도 그려진다. 그들은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는 친구와 거리를 두려 하거나(「모래가 되는 꿈」),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으나 현실의 벽 앞에 망연함을 느낀다(「꿈에서 꿈으로」). 여기서 꿈은 관계의 미묘한 틈과 심리적 긴장을 암시하고, 작가는 이를 통해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층위를 그려낸다. 독자는 『꿈 목욕』을 편편이 읽어나가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점차 확장됨을 실감할 것이다.
■ 작가(김지연)의 말
요즘 나는 자주 기지개를 켠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등이 공벌레처럼 둥그렇게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의식적으로 몸을 펴려고 알람까지 맞춰두었다. 눈을 감고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잠깐 잊은 채로 그저 몸을 멀리 늘어뜨리려는 동작에만 집중한다. 가슴을 펼치며 팔을 쫙 뻗는 것뿐이지만 점점 좁아지려는 것만 같던 속마음이 차츰 넓어지는 듯한 개운한 기분이 좋다. 이번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렇게 틈틈이 기지개를 켜면서 쓰고 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