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아직 청춘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몸에는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나 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잃어 가는 것만큼이나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 늘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몸에 먼저 오는 계절〉 중에서
오늘 다시 차를 바라보며 여기저기 남은 상처를 찬찬히 살폈다. 사람들이 왜 바꾸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만큼이나 버텨 준 게 고마웠다.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겠지만, 우리 가족 누구도 쉽게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동안 말없이 달려 주었고, 묵묵히 우리의 일상을 수없이 실어 나르며 지켜 주고 함께 늙어 왔으니까.
아직은 보내고 싶지 않다. 헤어짐보다, 미안함을 조금 더 싣고 달려야 할 시간이 남아 있어서다. 앞으로는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시간을 함께 지나왔는지 조금 더 생각하며 함께 가고 싶다. 조금만 더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면서. 번호판에 남은 네 자리 숫자. 그 숫자를 마음속으로 불러 보며 오늘을 마무리한다.
-〈 함께 달려온 시간〉 중에서
이쁜이를 떠올리며,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명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의 문제라는 것을. 동물조차도 자신을 사랑했던 이를 끝까지 마음에 품고 사는데, 우리는 너무 쉽게 등을 돌려 왔다.
이쁜이는 아직도 우리 가족을 기억하고 있을까. 염치없는 질문이다. 나는 이미 자격이 없다. 더 잘 돌볼 수 있었는데, 나는 너무 쉽게 손을 놓았다. 늙고 초라해지는 게 두려워, 새끼들만이라도 더 나은 데로 보내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늦게나마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가며 끝내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성공도 체면도 아닌, 배반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쁜이는 말없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도 조용히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다..
-〈배반하지 않는 마음〉 중에서
오늘 경품 행사 응모자는 4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뭐 하나라도 당첨되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꽝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온 게 다행이었다. 자동차는 앞선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당첨자 중에는 다른 지역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이런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뒤돌아서려니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샀다. 닭고기는 닭띠 마누라 하나로도 충분하다며, 사계절 내내 삼겹살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였다. 오늘은 자동차 대신 고기 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묘미가 삶을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되면 좋고, 안 되어도 크게 잃을 건 없는 기대.
그 정도의 설렘이라면, 가끔은 허락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묘미〉 중에서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이 안내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친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따라오라더니, 아까 맛있게 먹었던 나박김치를 한 통씩 싸주셨다. 작년엔 보리굴비였고, 올해는 나박김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내년엔 꼭 과일이라도 사 들고 가야겠다.
상점으로 돌아와 챙겨 놓은 목도리를 받았다. 새로 산 배낭에 짐을 넣고 나서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 묘한 뿌듯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검은 봉지에 든 나박김치 때문일까, 어깨에 멘 배낭 때문일까, 아니면 덤으로 받은 스카프 때문일까.
오늘 저녁 밥상은 아마 동대문 이야기로 시끌벅적할 것 같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도 이런 인심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차고 환해진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볼 만하다는 생각이 눈 녹듯 마음에 스며든 하루였다.
-〈맛보다 오래 남는 것〉 중에서
새참을 떠올리면 문득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에서 돌아오다 들판에서 새참을 드시던 담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논이 선생님 논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밥 먹고 가라”는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도망치듯 달려왔다. 새참은 늘 그렇게 부끄럽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 들어 자꾸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 힘들게 일을 다녀서인가 보다. 쑥떡은 쉬지 않았느냐고 조심스레 물으니, 떡은 구경도 못 했단다. 반장이 자기 집으로 다 가져갔단다. 골고루 나눠 먹자고 맡겼더니, 자기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로 여긴 모양이다. 생색내는 걸 싫어하는 남편은 직접 건네는 것도 어색했던지, 함께 다니는 형님에게 건넸단다. 점심때가 되어도 내놓지 않아 술 때문에 일이 끝나고 주려나 했더니, 일이 끝나자마자 가버렸단다. 풋고추에 쌈장까지 싸 준 선물도 있을까. 집에 가서 열어 보았다면 참 난감했겠구나 싶다. 일터에서 잘리면 갈 데 없는 노인네들이 서로 반장 눈치를 본다더니, 그 풍경이 겹쳐진다.
요즘 뉴스에서는 수십억의 대가성 뇌물이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린다. 평생을 아껴 살아도 집 한 칸 마련하기 어려운 세상에, 젊은이나 서민들 의욕을 꺾어 놓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용돈이라도 벌겠다며 또다시 일터를 찾는 퇴직자들이 늘고 있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나마도 경쟁이 치열하고, 대접 또한 점점 초라해지는 것 같다.
언제부터일까. 뙤약볕 아래서 흘린 땀을 위로하던 새참이 사라진 것은. 밥 한술, 떡 한 조각에 담겨 있던 서로의 정과 배려가 먼저 사라진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오늘도 흙을 파고, 누군가는 봉투 속 만 원을 들여다본다.
새참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의 온기마저 함께 사라지지 않기를…….
그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가방을 묵직하게 챙긴다.
-〈새참이 사라진 자리〉 중에서
“지지배가 겁도 없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조심해야 했고, 나서면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얼마 뒤 범인을 잡았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지만, 칭찬보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말라”는 말이 깊이 남았다. ‘지지배가’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가슴에 박혔다.
세상은 변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여자라서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 있다. 생각이 뒤바뀌지 않는 한, 현실도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조심하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 침묵이 흘렀다.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분노와 슬픔, 묘한 연대감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나는 한국여성의전화를 그저 힘든 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곳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폭력 없는 세상과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싸워 왔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막내딸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던 딸이 어느새 나보다 한발 앞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속에 키워 온 시간 너머로, 딸은 이제 내가 걱정만 할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믿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종종 외면하며 살아간다. 불편한 진실과 오래된 기억,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로부터. 그러나 그날 극장에서 나는 잠시나마 그것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불편했으나 그래서 더 필요한 자리였다. 특별한 곳, 그날 다녀온 곳은 영화관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마주 앉은 자리〉 중에서
책을 읽으며 다시 묻게 되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한강 작가는 글로 진실을 끌어올렸다. 글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광주 시민에게 사죄한 전두환의 손자를 떠올리며, 역사는 그렇게 이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문제다. 한밤중에 쏟아진 계엄령 소식은 과연 정당했는가. 끝나지 않은 탄핵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횃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그동안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광화문으로 가보려 한다.
먼 훗날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을 떠올리며, 부끄럽지 않은 할머니로 남고 싶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그 밤 계엄령〉 중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에게 최고의 음식이었던 떡을, 내 딸과 함께 지내는 병원 식구들에게 대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고사떡을 정성껏 바치던 마음,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온 떡 속 사랑. 이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떡을 준비하던 때가 되면 나도 떡을 한다. 비록 엄마의 사랑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떡을 준비할 때마다 엄마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떡과 내가 생각하는 떡이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 간다. 할머니의 간절함과 어머니의 간절함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그 병원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에 이고 온 떡’ 속 사랑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매번 떡을 만들 때마다 나를 따라온다.
-〈머리에 이고 온 떡〉 중에서
대학 진학을 고민하면서 남편과 함께 부천에 있는 대학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최종 선택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였다. 이 나이에 정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입학식에서 만난 만학도들의 얼굴은 오래된 동지처럼 느껴졌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자는 각오가 생겼다. 신기하리만큼 공부가 재미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머릿속이 텅 빈 백지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4년 만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물은 다 빠져나가도 콩나물은 자란다”는 조남철 교수의 말씀이 왜 방송대의 전설로 불리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 보고 듣고 느끼며 지나온 시간들을 엉킨 실타래 풀 듯 하나씩 풀어내며, 나 자신을 토닥이고 싶다. 그래도 잘 살아왔다고.
언젠가 나만의 책이 완성되는 날, 잠자던 나를 깨워 다시 꿈을 꾸게 해준 그 멘토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늦지 않았다는 그 말을, 비로소 내 삶의 문장으로 받아 적었다고.
-〈예순, 나는 다시 꿈을 적었다〉 중에서
어머니는 내가 모시는 분이 아니다. 내 곁에서 함께 살아 주는 사람이다. 운동 갈 때도, 시장 갈 때도, 성당 갈 때도 “다녀와라” 하시며 등을 떠밀어 주신다. 친구가 되어 주고, 요리 선생님이 되어 주며, 속이 아플 땐 죽을 끓여 주신다.
힘든 일은 그만하시라 해도 끝까지 우기며 해내시는 고집 센 할머니. 평생을 일하고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지런쟁이다. 봄이 오면 시골집을 다녀와야 한다며 수돗물은 얼지 않았는지, 묻어 둔 배추와 무는 괜찮은지, 25층 아파트 창 너머로 매일같이 봄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가밀라 씨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다”고.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모신다는 말〉 중에서
결혼한 지 10년쯤 되었을까. 뜻밖의 소식이 당도했다. 총명하기로 소문났던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으신 것이다. 유명한 병원을 전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모든 책임을 그분께 돌리기도 했다. 요양원도 흔치 않던 시절, 자식들은 각자의 삶에 바빴다. 나 역시 ‘출가외인’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엄마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희들은 걱정 말고 너희들 삶을 잘 살아라. 그게 애비한테 효도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0년의 세월 동안 어머니는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나셨다. 나는 반찬 몇 가지를 해 들고 찾아가서 청소와 빨래를 도와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편을 아버지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어머니는, 어느새 혼자 식사조차 어려운 상태가 되셨다. 어느 날 찾아뵈니 밥상 위에는 밥공기가 두 개였지만 숟가락은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숟가락으로 어머니에게 한 술씩 떠먹여 드리며 식사를 하고 계셨다. 말없이, 묵묵히.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왜 힘들다 말하지 않으셨는지, 왜 서운하다, 외롭다 한마디 못 하셨는지.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가정을 지키는 사람은 약해 보이면 안 된다고 믿었던, 그래서 혼자서 견뎌 낸 사람이었다. 이 땅의 아버지들 삶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못난 딸이 이제야 깨닫는다. 아버지는 참 훌륭했고 성실했고, 무엇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