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근현대 미술’ 하면 뉴욕이나 파리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논쟁적인 흐름의 중심에는 언제나 뜨거운 피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오랫동안 ‘고전’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 가둬두고 있었을 뿐이죠.
그동안 이탈리아 미술은 찬란한 과거의 유산으로만 기억되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시작해 중세의 금빛 성화, 미켈란젤로·라파엘로·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조화롭게 빚어낸 르네상스, 그리고 어둠 속의 극적인 빛을 그려낸 카라바조의 바로크까지. 대부분의 기억은 여기서 멈춥니다. 19세기 무렵 미술의 중심이 프랑스로 이동하고 20세기 추상미술이 미국을 무대로 성장하면서 이탈리아는 잠시 시대의 무대 뒤로 물러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이탈리아』는 바로 그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 잇고자 쓰인 책입니다. 잠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을 뿐, 이탈리아 화가들은 끊임 없이 새로운 실험을 이어왔고 수많은 미술 사조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_ 9~10쪽
스콰르초네는 예술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숙식을 제공하고 돌보기도 했죠. 그는 아이들에게 그림·라틴어·고대 미술 모사 등을 가르쳐 이들을 자신의 작업 인력으로 활용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운영했습니다. 만테냐 역시 그렇게 스콰르초네의 집에 머물렀는데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진 덕분에 견습생을 넘어 스콰르초네에게 법적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렇게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는 접하기 어려웠던 고대 미술 작품들을 접하고 실기 훈련을 하고 철학적 담론을 나누는 법을 배우며 르네상스형 인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스콰르초네는 제자들의 노동력으로 큰 수익을 올렸는데요. 그 수익 배분을 매우 불투명하게 운영했습니다. 만테냐는 자신이 만든 작품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적고, 스승이 자신의 이름과 재능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고 판단해 열일곱 살 무렵 소송을 제기해요. 법원은 만테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만테냐는 7년여 만에 스콰르초네의 그늘에서 벗어나 젊은 나이에 독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_ 29~30쪽
단순한 동정심 유발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촉구한 전략 덕분에 〈굴뚝 청소부〉는 1838년 브레라 전시회에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몰테니가 캔버스 위에 던진 화두는 당시 유럽 전체의 고민으로 이어져 서서히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먼저 영국에서는 1840년 굴뚝 청소에 10세 미만 아동의 참여를 금지했고, 마침내 1875년에는 16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완전히 금지하며 법규 위반 시 강력한 처벌이 따르는 법이 제정되었어요. 영국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는 1886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아동 노동 보호법이 제정되어 9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였죠.
단순히 일상을 그리는 장르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현실을 직면하도록 촉구한 ‘그림의 힘’은 시대를 움직였고,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그 어린 소년의 생생한 눈빛을 통해 사회적 양심을 묻고 있습니다.
_ 68~69쪽
만초니의 작업은 이처럼 모두 기발하고 파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단연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예술가의 똥〉이에요. 예술가의 똥을 담아 만든 작품으로 총 90점이 제작되었죠. 작품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정말 안에 똥이 들었는가?’였습니다. 작품을 만든 피에로 만초니 본인은 분변이 맞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작품이 90점이나 만들어졌기 때문에 작품 구매자 중 누군가 통조림을 열면 얼마든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
프랑스의 예술가 베르나르 바질이었죠. 1989년 〈피에로 만초니의 열린 상자〉라는 제목의 퍼포먼스 아트로 다섯 번째 통조림을 열었는데요. 그 안에는 또 다른 통조림이 들어있었습니다. 누군가 통조림을 열 것을 예상한 만초니의 계산이었죠. 바질은 그 안에 있는 통조림은 열지 않았어요. 그렇다 보니 작품이 만들어진 지 6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정확히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일부 통조림이 내부 가스 팽창으로 폭발한 사례들이 있었지만, 미술관은 특수 보관함을 제작했을 뿐 추가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죠.
_ 89~90쪽
카텔란은 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고 어머니는 청소부였죠. 어린 카텔란은 길거리에서 꽃을 팔고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거나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길게 하진 못했어요. 카텔란은 이에 대해 선천적으로 게으름이 있었던 탓이라고 말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이후 조금 게을러도 괜찮은 직업을 찾고 싶어서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해요. 비록 미술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스물여덟 살이 된 카텔란은 일단 해보기로 합니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스물아홉에 첫 개인전을 진행했죠. 그리고 전시장에 노쇼합니다. 전시장엔 “나는 곧 돌아오리라.”라고 적힌 팻말이 있었고 관객은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결국 카텔란도, 그 어떤 작품도 전시장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첫 개인전이라는 공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했죠.
_ 95~96쪽
폴록은 성공한 예술가 반열에 오릅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화풍도 구축했고 평단의 논리적 비평을 획득한 데다가 비싼 금액에 작품을 사는 구겐하임 같은 후원자는 물론이고 기업들의 후원까지 따르게 되었죠. 예술가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폴록은 이 시기에 화풍을 바꿉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추상회화를 그렸고, 색깔도 블랙 앤 화이트로 간단하게 구성했죠. 이 선택은 많은 이들을 다시 한번 당황하게 만듭니다. (…) 폴록은 확실한 이유를 대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폴록의 동료였던 예술가 마크 로스코는 “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선택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라는 의미죠. 국가와 언론, 평단이 선택한 예술가가 되어 누린 화려한 삶은 폴록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얻게 해준 화풍을 금세 그만두고 세상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이 폴록이 주체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죠. 어쩌면 폴록은 미국이 바라보았던 것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극적인 예술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의 진실한 모습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이 폴록을 사랑하는 이유일 거예요.
_ 159~160쪽
리피의 삶을 뒤흔든 사건은 50세가 다 된 나이에 찾아옵니다. 프라토의 수녀원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모델이 된 20대의 아름다운 수녀 루크레치아 부티에게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욕망에 솔직했던 리피는 결국 축제 날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합니다.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이라니,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형 스캔들이었죠.
하지만 이 위험한 사랑은 우피치 미술관의 보물 〈성모와 아기와 두 천사〉라는 걸작을 탄생시킵니다. 이 그림이 혁신적인 이유는 성모 마리아가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최초로 인간을 모델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마리아는 당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과 진주 장식을 한 채 우아한 옆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바로 리피가 사랑한 여인 루크레치아입니다. 그녀 품에 안긴 통통한 아기 예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필리피노 리피라고 전해집니다.
_ 191쪽
미켈란젤로만의 장치는 하나 더 있습니다. 감상자가 아니라 ‘신’을 대상으로 작품을 기획한 것이죠.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피에타’는 종교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도상입니다. 대부분의 피에타는 마리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강조해요.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마리아가 더 강조된 모습입니다. 관객의 시선에서 보면 예수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죠. 이 부분 역시 비난받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은 신께 바치는 것이므로 신의 시선에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실제로 〈피에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축 처진 그리스도의 몸과 생기를 잃은 얼굴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작품의 주인공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되죠. 예술이 종교의 교리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던 때, 그 메시지를 관객이 아닌 신에게 바치면서 본인의 예술을 차별화한 겁니다.
_ 235~236쪽
반 고흐는 평생 외로웠고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기름에 젖어 찢겨가던 이미지 위에서 다시 피어난 〈피에타〉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를 건넵니다.
“당신의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 길을 걸어봤으니까요. 하지만 어둡고 짙푸른 절망 끝에는 반드시 노란빛의 구원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삶이 버겁거나 엎질러진 기름통처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면, 시스티나 성당으로 급히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이 그림 앞에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목회자, 고독한 화가 반 고흐가 붓으로 쓴 색채의 복음이 당신의 지친 어깨를 조용히 감싸줄 겁니다.
_ 274~275쪽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적 건축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 공간입니다. 18세기 양식의 아름다운 궁전 건물을 거닐며 왕가의 호화로운 생활을 상상하고, 그들이 매료되었던 동양의 예술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어요. 궁전을 둘러싼 광활한 카포디몬테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작품 감상 후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정원입니다. (…)
베수비오 화산과 나폴리 만이 내려다보이는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언덕에 오르면 과거 그랜드 투어를 마친 여행자들이 느꼈을 감동을 고스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옛날 여행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작은 베두타Veduta 풍경화 한 점을 기념품처럼 품에 안고 떠났던 마음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떠난 그랜드 투어를 마치며, 여러분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한 점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_ 332~3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