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요.”
“매일 밤, 전쟁 중에 죽은 서방님이 찾아와요, 온몸이 찢겨서….”
“우리 아기가 매일 밤 울어요. 제가 죽였어요. 전쟁 중에 왜놈들한테 들킬까 봐, 우는 아기를 꽉 끌어안았는데, 아기가 숨을 안 쉬었어요.”
“귀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좀 해주셔요.”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찢겨 상처 난 가슴들은 여즉 아물지 못했다. 여전히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수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의 상처를 어찌해야 할지, 수인은 몰랐다.
(P.27)
수인은 위패를 들어 묵묵히 바라보았다.
동굴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다.
‘나리께선 죽은 자를 보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저는 두렵지 않아요. 동을비가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지금 그는 그 질문을 곱씹고 있었다. 위패에 불을 붙여 소지했다. 동을비가 어딘가에서 아씨와 무사히 만나기를 바라며.
돌아서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무심코 펼쳐 보았다.
“견귀방. 귀신을 보는 약방문.”
수인은 터무니없다 여기며 약방문을 태우려다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P.50)
나인은 늘 점잖던 상궁이 저리 당황하는 게 의아했다. 뭘 하셨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방문을 보게 되었다. 여자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어 뜻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낮은 음성이 기괴하게 들려왔다. 나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상궁을 쳐다봤다.
“마마님, 침소에….”
상궁이 무서운 얼굴로 나인을 노려보았다. 나인은 그만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상궁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른 심부름을 시켰다.
나인은 다시 전각을 나서며 생각했다. 내전 침소에 분명 누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숨기고자 상궁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누굴까? 새로 승은을 입은 궁녀일까? 그렇다면 그 기괴한 소리는 뭐였을까…
(P.54)
“전하, 방계혈통으로 얼마나 고단하셨습니까? 전하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혈통 때문에 전하의 최선을 인정해주지 않았지요. 저들은 왕실의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조선을 바로 세우는 길은 오로지 적통 왕자밖에 없습니다. 해서 영창대군을 세우셔야 합니다.”
수인은 여인이 속삭이는 소리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저 여인이 왕실을, 조선을 흔들고 있었다.
의식을 마친 듯 여인은 허리를 바로 세우더니 머리꽂이에 손을 대고 한동안 임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인은 경악하고 말았다. 가흔이었다. 귀신이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던 가흔. 그녀가 왜 이곳에, 저런 모습으로 있는 것인가. 수인은 이 모든 것이 그저 꿈만 같았다.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