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주체는 바뀌었으나, 사람은 살아서 또 다른 삶을 펼쳐 나갔다. 이색이 대내외에 내건 「선언」은 ‘문장으로 나라를 경영한다〔문장경국文章經國〕’였다. 삼봉 정도전에게 성리학은 불교를 넘어뜨릴 수 있는 최상의 무기였다. 눈 뜨는 아침부터, 다시 깨는 또 다른 아침까지 유학의 갑옷을 벗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는 유학으로 지배하는 이상 국가 건설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나 전통, 불교는 예외 없이 ‘이단異端’의 올가미로 묶어 조이고, 잘라내고, 말살하려 들었다. 불교는 ‘0순위’의 ‘이단’이었다. 삼봉은 세속의 권력을 새로 움켜쥔 ‘저승사자’였다._1권, 6페이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학사를 관통하며 영향을 준 단 한 명의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두보(712~770)다. 고려와 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은 ‘시성詩聖’ 두보를 정점에 두고 사유했고, 글쓰기의 본보기로 삼았다._1권, 7페이지
1444년(세종 26) 『찬주분류두시』(시 25권, 문 2권, 목록 1권의 전 28권)를 초주 갑인자로 펴냈다. 1년의 짧은 기간에 집단 지성이 참여해 이룩해 낸 빛나는 성과였다. 애오라지 조선에서 편찬한 ‘두보 시 전집’이었다. 세종은 이 책을 바탕으로 ‘문장’과 ‘말’의 규범을 만들어 국정운영과 외교에 활용하려고 했다. 훈민정음 보급의 첫 사업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었다. 시를 바탕으로 조선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찬주분류두시』는 40년 뒤인 1482년(성종 13) 간행한 『두시언해』로 이어지며 ‘시학 진흥’과 ‘문장 수업’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 1권, 8페이지
‘새로운 인문의 시대’를 연 세종은 정치가와 문장가들에게 간절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일할 것을 주문했다. 끊임없이 국정운영에 ‘허튼 말’과 ‘거짓말’이 파고들 틈을 틀어막았다. 나라를 나라답게 이끌어가는 요체는 위정자들의 말과 글의 ‘바름’에 있음을 온몸으로 실천한 왕이었다. 천봉만우는 세종의 ‘시로 짓는 조선’을 도운 최고의 선지식이었다._1권, 9페이지
한자와 훈민정음은 저항과 수용을 거듭했다. 한문과 한자의 힘이 강하면 훈민정음은 파고들 공간이 생기지 않았다. 지금은 온 세상에서 너나없이 쓰고 있지만, 1450년의 앞과 뒤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_1권, 9페이지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체계를 넘어, 사상을 담는 그릇이며 문명을 여는 기호체계였다. 본서는 그 담론의 중심에 불교가 수행해 온 언어에 대한 철학적 사유, 시문학이 구현한 상징적 정서가 깊이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조선 전기 문명의 총체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접근이 될 것이다._1권, 12페이지
왕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가라앉은 훈민정음의 물길을 살리기 위해 혜각존자 신미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고승 대덕과 힘을 모아 불경의 언해 사업을 펼쳐 나갔다._2권, 7페이지
말과 글은 시간의 무늬다. 흐르며 바뀌고, 또 흐른 곳으로 올라가고 내려온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그때가 오면 보라는 것이다. 숨겨둔 뜻을 찾는 즐거움이 우리말 속에 있다._2권, 8페이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이 두보를 만나 ‘빛’으로 번지고, ‘노래’로 퍼져나갔다. 천봉만우·일암학전과 함께 교유했던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 탁월한 문장가들의 대를 이은 후학들이 엮고, 읽고,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두시언해』는 ‘기쁨’과 ‘슬픔’으로 버무린 이중주였다. 단아하고, 힘찬 조선의 시와 노래가 휘몰이 장단과 자진모리 장단으로 바뀌어 산을 넘고, 강을 넘어 멀고도 가까운 미래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를 쓰는 순간 시는 시가 아니다._2권, 9페이지
훈민정음은 오지 않은, 하지만 반드시 이 땅에 와야 할, 아니 이미 벌써 와 있는 미륵의 또 다른 이름이다._2권, 9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