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3선을 역임하며 포항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킨 12년을 기록한 이 책은 한 개인의 영광과 성과를 정리한 글이 아닙니다. 50만 시민과 2천300여 포항시 공무원 모두가 함께 쓴 장엄한 서사시이자 아름다운 영일만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다한 저 이강덕의 진심 어린 고백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들려 합니다. 그동안의 소중한 경험과 성취를 품고 더 넓고 큰길을 가려 합니다. 어깨 위에 놓였던 무거운 책임감은 내려놓지만, 제 마음의 이정표는 언제나 더 큰 포항, 위대한 경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향해 있을 겁니다. 그 여정에 변함없는 응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책 속으로]
12년 재임 동안 두 차례 장기휴가를 냈다. 알려져 있다시피 전립선암 치료 때문이었다. 2023년 2월 27일부터 자리를 비웠다가 4월 26일 1차 치료를 마치고 복귀했고,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치료를 받으려 5월 15일부터 다시 장기휴가에 들어가 7월 13일 돌아왔다.
몸에 탈이 난 사실을 처음 안 것은 그해 2월 건강검진이었다. 코로나19 와중에 터진 태풍 힌남노 수해 탓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몸에 신호가 왔다. 병원에서 비뇨기 계통 이상 소견이 나왔고 수술을 했다. 혈액 검사도 했는데 당시에는 암 소견이 없었다.
첫 수술 뒤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자 온몸이 너무 아팠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눈은 퉁퉁 부어서 뜰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혈압이 급하게 떨어지면서 잠시 의식을 잃었고, 아내에게 유언을 남길 정도로 위급했다.
4월 재수술 과정에서 조직 검사를 했는데 암이 발견됐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다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얄궂은 현실 앞에서 아내는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흘렸다.
되돌아보면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건강을 돌보는 데 너무 무심했다. 취임 직후인 2015년에는 ‘메르스’가 한국을 강타했고, 2017년에는 지진으로 포항이 초토화됐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2022년에는 지방선거 공천 파동과 태풍 ‘힌남노’가 나를 몰아붙였다.
앞만 보고 달리며 일을 하다 병을 얻었지만 정말 시민들에게는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처음에는 금방 복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합 넉 달이나 걸렸다. 생각하지도 못하던 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병가로 출근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마음은 늘 시청에 있었다. 건강을 되찾으면 지역 발전을 위해, 나를 믿고 시정을 맡겨 준 시민들을 위해 더욱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시민들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각오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서 받은 위문편지는 소중한 추억이다. 빨리 나아서 돌아오라는 손편지를 사탕과 함께 보내왔는데, 삐뚤빼뚤한 글씨에서 진심이 느껴져 뭉클했다. 완쾌 뒤 시청에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그 아이들이 너무나 감사했다.
2023년은 여러모로 힘든 한 해였다. 2월 6일 선친(향년 87세)을 여의었다. 아버님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장기면 방산리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어머님과 사이에 나를 비롯해 3남 2녀를 낳아 헌신적으로 키워 주셨다.
생전에 아버님은 “강덕이는 내 아들인지 남의 아들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물론 우스갯소리였지만 들을 때면 마음이 짠했다. 공복(公僕)으로 국가에 내놓은 이상 이미 당신만의 자식이 아니란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 사사로운 정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셨을 테다. 그래선지 낡은 집을 고쳐드리려 해도 완강히 거절하셨다. “그럴 돈 있으면 어려운 사람이나 도와줘라. 평생을 이렇게 살아와 불편한 것 없다.”라고만 하셨다.
만 39세 젊은 나이에 포항 남부경찰서장으로 부임해 고향에 오자 부모님은 기뻐하시면서도 “이렇게 빨리 승진하면 빨리 옷 벗어야 하는 거 아이가?”라면서 걱정을 해 주셨다. 부모님께 근심이 생기지 않도록 반듯하게 처신하는 게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가르침은 40년 넘는 공직 생활 동안 내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준 나침반이었다. 덕분에 언론에서는 우리 사회를 위한 나의 작은 봉사를 분에 넘치게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중략) 사실 부모님 품을 일찍 떠난 터라 제대로 효도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달성고, 경찰대에 진학하면서 포항 남부경찰서장 재임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40년 만인 2014년 고향에 돌아와 12년을 보냈다. 하지만 고향은 늘 내게 그리운 곳이었다.
어머님이 아직 계시는 고향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일일이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주민은 많지 않다. 내가 다닌 산서초등학교와는 10리, 장기중학교와는 20리나 떨어져 있는 산골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추억이 참 많아 고향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된 것 같다.
중학교 시절 한 분의 은사를 만난 건 인생의 행운이었다. 3학년 때 담임이셨던 류정순 선생님의 영향으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며 자신감을 심어 주셨다. 나는 훗날 첫 시장 취임식에 선생님을 초대해 가장 앞자리에 모셨다. (중략) 앞서 밝힌 대로 고향은 내게 다른 어떤 가치보다 숭고하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어머님이 살고 계시며, 나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 때문에 고향의 부름에 보답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키워 준 고향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경찰공무원과 행정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같다. 경찰에서 경험이 포항시 행정을 이끄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업무 원칙과 실행 방식이 다를 순 없기 때문이다. 경찰에 몸담았던 시절에도 유능한 시장, 도지사님들과 교유하면서 노하우를 많이 익혔다.
재임 동안 지진과 코로나19, 태풍 ‘힌남노’ 수해 등 잇단 재난을 극복하며 ‘위기에 강한 행정가’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대해선 외유내강하신 어머님의 성격을 물려받은 덕분이 아닌가 혼자 생각하곤 한다. 퇴임하면 자주 찾아뵙고 그간 못한 효도를 다 하려 한다.
아내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꽃다운 스물다섯 나이에 결혼해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도록 내 뒷바라지와 아이들을 키우느라 호강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시장이 되고 나서도 조용히 내조에만 충실했다.
특히 몇 년 전 건강 문제로 고비를 겪었을 때 아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용기를 줬다. 부부간에 신뢰와 애정이 더욱 두터워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도 있었다. 첫 딸 승민이가 생후 6, 7개월 만인 1991년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몇 년 동안은 자다가도 깰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아내는 내가 남의 아이를 안아 주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눈물을 글썽였다.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 컸는데 1997년 쌍둥이 아들을 얻어 둘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짧았던 나 대신 아내가 요즘 말로 ‘독박육아’를 감당한 것은 정말 미안하다. 아내는 아이들이 크면서 살림살이가 빠듯해지자 다시 일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선거에 처음 나설 때도 내 편이 되어줬다. 아내는 “어차피 내 할 일 따로 있고, 당신 할 일 따로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나의 도전에 찬성했다.
마지막으로 12년 동안 늘 응원과 격려,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거듭 올린다. 한마음 한뜻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해 큰 잘못 없이 임기를 마무리하게 해주신 2천여 포항시 공직자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p. 210, 제9부 ‘여러분과 함께여서 참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