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즐거움 속에서 만나는 자유,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충만,
단정하고 단순한 일상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행복
2010년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다. 스님은 떠나기 전 유언으로 자신의 모든 저작을 절판해달라고 당부했다. 무소유를 평생 실천한 이답게, 죽음 이후에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스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스님의 가르침을 독서가들은 더욱 절실하게 갈구하는 중이다. 이처럼 강퍅하고 소란스럽지만 내면은 텅 빈 세상에서, 고요하고 소박하면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삶의 길을 보여준 스승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법정 스님이 사랑한 생활』은 바로 그 그리움 속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인 저자 백형찬은 젊은 날 법정 스님의 책을 읽으며 삶의 방향을 배웠고, 1989년 송광사 ‘출가 4박 5일’ 수련에서 스님을 직접 만났다. 그 경험을 쓴 수필로 등단한 그는 이후 30여 년간 스님의 지인으로, 한편으로는 스님의 모든 저작을 독파한 열성 팬으로, 스님과 인연을 맺어왔다. 그 오랜 독서와 사유의 결실인 이 책은 동시에 스님께 올리는 조용한 헌정이기도 하다.
소유는 줄이고, 감각은 깨우고, 마음은 가볍게.
아무것도 갖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사랑한 삶의 품격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을 꼽으면, 종교와 종교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겠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불교 승려에 대해 쓴 책이고, 스님(덕조 스님)과 수녀님(이해인 수녀)이 함께 추천사를 썼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간 예의가 아니라, 법정 스님의 가르침에 특정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보편적 영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책 속에는 법정 스님이 개신교 목사 부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며 느낀 묘한 친근감, 수도원에서 지낸 경험, 그리스도교 성인 샤를 드 푸코에 대한 존경 등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스님은 종교의 이름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다. 막스 뮐러의 말처럼, “형제나 부자, 친구 사이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저자 역시 가톨릭 신자이지만, 법정 스님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결국 종교의 경계를 넘어 한 인간의 고결한 삶 자체를 배웠다. 이해인 수녀는 추천사에서 “스님이 사랑한 것들에 스며있는 소박하고 겸손한 생활 속의 영성을 더욱 닮고 싶어집니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지향하는 지점,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써의 영성이다.
일상 속 깨달음의 순간들,
무소유의 탄생
이 책에서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추상적인 교훈이 아니라, 산골 오두막의 생생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난초 이야기다. 스님은 난초를 정성껏 가꾸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난초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난초가 시들까 봐 걱정하고, 꽃이 피지 않으면 속상해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스님은 난초를 다른 이에게 주어버린다. 그 순간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 경험에서 유명한 ‘무소유’의 가르침이 탄생했다.
용담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개울가에서 꽃을 피우지 않는 용담을 발견한 스님은 “잘 있었니?” 하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 날 용담 앞에 다가가 속삭인다. “나는 네 방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참 궁금하다. 한 번만 보여주지 않겠니?” 다음 날, 늘 굳게 닫혀 있던 용담이 진남빛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스님은 이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
산토끼가 한겨울 밤 추위를 피해 방 안으로 뛰어들어온 일화, 왕복 80리 산길을 걸어 약을 구해 온 도반 수연 스님과의 우정, 성철 스님에게 글씨를 청했다가 단호한 거절을 당하며 배운 겸손함 등, 책 전체가 이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 생생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독자는 마치 불일암 마루에 앉아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그 이야기들을 직접 듣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차, 책, 그리고 음악만으로도 충분한 삶
『법정 스님이 사랑한 생활』은 법정 스님의 삶을 그리며 시간의 흐름 대신, ‘스님이 사랑한 것들’이라는 주제별 구성을 택했다. 풀과 꽃, 나무, 동물, 차(茶), 사람, 독서, 음악, 미술, 여행, 글쓰기, 선묵, 공간, 음식, 생활소품 등 14개 장으로 나뉘어, 각 장마다 스님이 그것들과 어떻게 관계 맺었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자연(풀과 꽃)에서 출발해, 점점 내면의 세계(글쓰기, 선묵)로 깊어가는 흐름이다. 스님과 함께 산중 오두막의 일상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이끌린다.
‘차(茶)’ 장에서는 스님의 깐깐한 고결함이 잘 드러난다. 스님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수행이었다. 새벽 예불 후 샘물을 길어와 차를 달이고, 첫 잔은 부처님 전에 올리고, 둘째 잔을 들고 다실에 앉을 때, 고요하다. 스님은 말한다. “향기롭고 맑은 차 한 잔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독서’ 장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스무 번 넘게 읽은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은 『어린 왕자』와 『화엄경』 두 권을 ‘인생 책’으로 꼽았다. ‘음악’ 장에서는 바흐와 모차르트뿐 아니라 최희준의 〈하숙생〉, 송창식의 〈푸르른 날〉 같은 가요까지 두루 즐긴 스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스님은 이야기한다. 차와 책과 음악,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살림살이는 넉넉하다고. 그 이상은 사치라고.
유언과 그리움 사이에서 태어난 책
(사)맑고 향기롭게 재단은 원고를 모두 검토한 뒤 책을 공식 추천했고, 저자는 모든 수익금은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덕조 스님(길상사 주지, 동 재단 이사장)은 추천사에서 “스님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맑고 고요한 수행자의 일상을 다시금 우리 곁에 불러오는 따뜻한 여운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평했다.
스님의 유언과 제자들의 그리움 사이에서 태어난 이 책은 법정 스님을 잊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조용한 위로이자 위안이다. 동시에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나는 독자들에게는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고 맑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법정 스님의 마지막 질문을 다시 듣게 된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