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서정에서 서사의 흐름으로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 도서전에서 여러 차례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서선정 작가의 작품은 늘 우리 일상의 가까운 자리에서 시작된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일상의 작은 변화, 눈에 띄지 않는 물건, 반복되는 하루 같은 것들이 그의 그림책에서는 천천히 빛을 얻는다. 화려한 상상보다 생활의 결을 믿는 작가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감정의 자리를 마련해 왔다.
《서랍 정리하는 날》 또한 그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다만 이번 책에서는 그동안 장면 중심의 서정적 흐름을 보여 왔던 작가의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옷 정리라는 일상의 사건을 중심으로 비교적 뚜렷한 서사를 형성한다. 이는 독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감정과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고, 장면마다의 여운을 하나의 이야기로 단단히 묶어 준다.
담백하고 분명한 서사
《서랍 정리하는 날》은 어린이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루의 풍경을 차분히 따라간다. 짧고 단순한 문장과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글은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상황과 장면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옷 하나를 꺼내고, 기억 하나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에피소드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고, 이사 전 옷 정리라는 하루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아이와 엄마의 대화는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 주며, 독자가 인물의 감정과 시간을 스스로 읽어 내도록 돕는다. 이러한 서술은 어린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가기 쉽도록 하면서도, 기억과 관계가 쌓여 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겹겹이 쌓아 올린 색, 촘촘한 이야기의 밀도
색과 패턴을 통해 일상의 감각을 풍부하게 펼쳐 보이는 작가 특유의 스타일은 이번 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책장을 열면 선명한 색감과 화려한 패턴의 향연이 펼쳐지고, 털 스웨터부터 극세사 잠옷, 꽃무늬 원피스, 데님 멜빵바지, 줄무늬 티셔츠까지 옷감의 질감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가는 선 하나, 작은 면 하나도 컴퓨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손수 색연필로 작업했다. 여러 색을 덧칠해 밀도를 쌓아야 하는 색연필 작업의 느린 과정은, 기억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이 책의 느리고 조용한 서사와 맞닿아 있다.
화면 역시 인물이나 사물의 줌 인-아웃이나 극적인 구도 변화 없이 펼침면의 정면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독자가 자신의 속도로 이야기에 머물도록 이끈다.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돌봄과 기억의 서사
이 책의 중심에는 전승과 연대라는 '이어짐'의 정서가 흐른다. 옷을 고쳐 입고 물려주는 행위는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돌봄의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생활의 방식이다. 할머니와 엄마, 아이로 이어지는 관계를 따라가며,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여성의 기억과 시간이 한 가족의 서사로 축적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할머니의 부재마저도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생활 속 온기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상실 이후의 삶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한다.
빠르게 버리고 새것을 찾는 시대에, 《서랍 정리하는 날》은 느리게 아끼고 오래 기억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유산임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