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연화는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완벽한 고독 속에, 소설의 세계 안에 침잠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두려워한다. 사실 이 양면의 정서적 갈등과 쉼 없는 성찰이 강연화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강연화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의 소회는 이렇다. 아프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통증의 기원을 더듬어가다 보면 공감하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기에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강연화의 소설 속에서 점묘화처럼 촘촘히 찍어간 고통스러운 시간과 지옥 같은 공간에서도 빛나는 풍경을 찾아내는 성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그 절절함을 참아내는 불편함과 두려움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한쪽에 기꺼이 고통 속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긴다. 그것은 강연화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소설적 연대’이다. 강연화의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여성들의 고단함과 그녀들이 감내하고 있는 삶의 양상을 그리는가 하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비슷한 환경과 처지에 놓인 여성들과의 연대 방식을 보여준다.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은 동맹의 욕망을 품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연대가 혈연이나 학연 등이 아닌 결연(結緣)의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소설 「구름이 되어 다시」에는 세 여성이 등장한다. 화자인 ‘미’와 그녀보다 열두 살이 어린 ‘은하’, 그리고 ‘혜성’이 그러하다. 은하와 미는 ‘개’라는 공통의 화제를 바탕으로 전화기 속에서 만나며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하다 은하 어머니의 임종을 놓쳤을 정도이다. 어머니도 연인도 모두 떠나고 미까지 떠나는 날에는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만큼 은하는 미에게 깊숙이 의지한다. 미와 은하의 관계, 미와 혜성의 관계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미는 혜성의 나이 무렵에 스무 살 은하를 만나게 되는데, 은하는 미의 옛 기억을 소환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미는 ‘미’이면서 ‘은하’가 되기도 하고 때론 ‘혜성’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세 여성이 각각 하나의 꼭짓점을 맡아 삼각의 구도를 유지하는 듯하지만, 결국 여러 인물의 겹이 하나로 포개지는 서사의 흐름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이다.
강연화의 소설 속 여성들은 삶의 돌파구를 찾아 끊임없이 방법을 강구한다. 이는 주로 다른 여성과의 연대라는 형식으로 발현된다. 「최적의 거리」에서는 전화뿐만 아니라 만남이 여의찮으면 편지 쓰기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소통하고자 한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소통으로 볼 수 있다. 오고 가는 마음속에서 그녀들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므로 남편의 몰이해와 잔소리도 그녀들의 의지를 막지 못한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녀는 “눈부신 고독의 순간에” 갑자기 떠오르는 존재이다. 문득 전화를 걸어 “부추를 씻는데 네가 생각났”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녀를 향한 ‘나’의 정서는 동경과 부러움 사이, 결핍과 충만 사이를 헤맨다. ‘나’는 그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그녀의 집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오가는 시간이 더 걸려도, 빠듯한 살림에 야간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어도 나는 어김없이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발길은 그녀의 집을 찾는다.
「자포리」는 남성들의 혈연관계로 인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관계가 규정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며느리로서, 동서, 형님으로서 고된 시집살이와 시댁의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이들의 서사가 핍진하게 펼쳐진다. 자포는 곧 “아름다운 지옥”이다. 노란 벼 이삭이 바람에 출렁이고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흔들리는 곳, 대나무 울타리 너머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되는 경북 영천군 북안면 자포리가 그곳이다. 스물네 살에 결혼해서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의 연이는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개로 자포리에서의 기억은 고난의 서사로 점철되어 있다. 서슬 퍼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인해 막내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궂은일을 감당해야 했다. 연이와 형님, 동서 사이의 두 여인은 시아버지의 늦은 귀갓길에 마중을 가라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팔짱을 끼고 더듬더듬 어두운 밤의 시골길을 함께 걷는다. 시아버지가 올 때까지 대나무 울타리 아래 서로 몸을 숨긴다. 시아버지의 환갑연을 위해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들이 시댁에 와서 누에를 치던 방에 아기들을 뉘어놓고 부엌과 방을 번갈아 드나든다. 큰형님의 주도 아래 시어머니 몰래 소고깃국 한 대접, 참깨 한 주먹을 집어 먹으며 혹여 시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목소리를 낮춘다. 책잡히기 싫은 마음, 쑥을 뜯으며 달래는 마음, 풍경으로 위로받는 마음이 모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약자로서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모습이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소설이 있다. 「폭염」에는 자주 보던 동네 오빠, 정체 모를 남자애들, 서슴없이 학생들을 추행하는 교사, 알바생에게 성폭행을 일삼는 사장, 부하 직원을 노골적으로 추행하는 상사, 그리고 끊임없이 흘긋대는 남자들이 나온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각적, 물리적 폭력 앞에서 그녀들은 광장의 구호와 고백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상처만 덧날 뿐이라고 자조 섞인 푸념을 한다. 반면 “가만히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얘기해서 알려야지”, “이야기를 해서 세상에 알려야 해. 온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해야 해”라는 자각의 외침도 잊지 않는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는 혈연의 울타리 안에서도 천대받으며 언어적·물리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삼촌의 집에서 군식구로서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할머니 역시 소외된 존재로 ‘나’와 동종의 연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연대는 깨어지고 ‘나’의 고통은 극대화된다. ‘나’가 불합리한 가족의 폭력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라는 좌우명을 바탕으로 또래 사촌들의 무지막지한 폭력, 그들에게 받는 “온갖 수모와 배신감”을 꿋꿋이 견딘다.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노력한 끝에 성공한 어른이 되지만 ‘나’는 ‘그들’의 불행한 현재가 반갑지 않다. 몰인정한 악행에 대한 징벌보다는 어려움을 딛고 목표한 바를 성취한 ‘나’의 모습을 ‘그들’이 목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와의 연대를 통해 비참하고 힘겨운 삶을 극복할 수 있었다.
「초읍의 시」의 ‘터프’는 십오 년 동안 함께했던 개로 ‘나’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생, 형이기도 한 존재이다. 엄마로부터 제 앞가림도 못한다고 핀잔을 듣는 ‘나’는 시인 지망생이다. ‘터프’와의 산책은 ‘나’에게 있어 막막한 현실을 타개할 작은 숨구멍의 시간을 선사한다. 나이가 들어 쇠락해진 터프 대신 눈이 되어주며 ‘나’는 ‘터프’와의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산책은 ‘터프’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나’에게도 소중한 시간이다. ‘나’는 ‘터프’를 위해 뾰족한 가지를 치워주고 깨진 유리 조각, 돌멩이, 쓰레기, 토사물 등을 없앤다. 눈이 먼 ‘터프’ 덕분에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때 ‘나’와 ‘터프’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타자가 된다. ‘나’는 눈이 먼 ‘터프’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터프’는 그런 ‘나’에게 안정감과 위안을 준다. 인간과 비인간인 동물의 관계이지만 이들의 연대는 언어가 아닌 정서적인 공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공고한 연대가 있었기에 ‘터프’의 죽음 이후에도 ‘나’는 쓸쓸함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 것이다.
강연화의 소설에서 다양한 형태로 조명되는 연대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연대의 방식을 통해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견고한 폭력의 벽을 타개할 힘을 모으는 것이 가능해진다.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어려운 무언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힘. 그것이 바로 강연화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원천이자 연대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