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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떠도는, 횡단하는, 스며드는
― 자본 바깥에서 진보를 상상하기
진보의 새로운 주체를 꿈꾸는 것은 가능한가
1998년 한 월간지에서는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좌담을 개최한다. 한국의 98년을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와 전년도 12월에 결정된 IMF의 구제금융 지원으로 인한 사실상의 경제 주권 상실이라는 두 가지 사건으로 요약해 본다면, 이 같은 주제의 좌담이 필요했던 사정을 쉽게 이해해 볼 수 있다. 정부 수립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정치적 이슈가 대통령 직선제와 정권교체라는 두 큰 목적이 형식적으로나마 차례로 달성된 이후 소거된 자리에 경제적 기준과 가치가 재빠르게 채워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전 시기 한국의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면서 노동 환경 개선의 구체적 요구를 내세우게 되었을 때, 그것은 책임 있는 경제·정치 분야의 권력자들을 향하게 되고 나아가 사회적 차원의 공감대를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단어가 더 이상 동일한 환경이나 계층을 지칭할 수 없게 된 만큼 그들의 요구 역시 저마다 다르게 겪고 있는 경제적 문제의 범주를 쉽게 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좌담에서도 역시 그에 대한 반성은 두 가지 방향으로 검토된다. 먼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사회에 대한 성격 규명이다. ‘독점자본주의, 종속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등 지난 시기 우리 사회에 대해 내린 규정들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모순점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처럼, 정치적 가치판단과 경제적 목적이 빠르게 괴리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성격 규명”이 이루어진 이후에 “진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범위, 대상” 역시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이전 시기 스스로 진보의 주체임을 자인해 왔던 노동자계급 내부의 문제점 인식이다. 좌담에 참여한 인물들은 우선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을 진보의 주체로 생각하는 데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의 뚜렷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노동자들은 그 변화의 동력을 “사회발전의 에너지”로 적극 수용하지 못하거나, 또는 “수동적으로 휩쓸린 결과”로 인해 스스로 현실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의 극복을 위해서라면 변화된 사회현실에 대응이 가능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구”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일상적 소통이나 유기적인 연대”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때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대학생들 역시 심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접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80년대와는 다르게 사회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분노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는 언급에 한 참가자의 다음과 같은 대답이 자못 흥미롭다.
한 5년 후쯤에는 달라지지 않겠어요? IMF시대에 실업자 아버지를 둔 고등학생들이 대학생이 될 것이고, 그때 되면 달라질 거예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진지한 상황 판단이라기보다는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온 가벼운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지금의 관점에서 이 말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주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 말에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물질적 생산과 그에 따른 생산관계를 사회적 존재의 핵심 구성 요건으로 받아들이면,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아래에서 언제나 구조적 착취 아래 놓여 있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의 적대적인 계급적 인식에 이르기만 한다면 필연적으로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역할을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때 ‘대학생’은 예비 노동자이거나 또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이론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적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IMF 시대에 개인적 차원에서 이미 그 모순을 직접 경험하게 된 세대가 대학생으로, 나아가 노동자 계층으로 유입된다면 진보의 사회적 지형도를 보다 확대해 나갈 수 있다는 인식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로환경에 대한 노동자들의 개입 의지를 드러내는 간접 지표 중의 하나인 노동조합조직률을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2003년도를 기점으로 하향곡선이 분명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소비사회로의 변모, 그러니까 가치를 생산하는 근원이었던 ‘노동’의 자리를 ‘소비/행위’가 차지하게 된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일찍이 베블런이 주장했고, 부르디외가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처럼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노동이나 생산과 무관한 소비의 영역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소비 상품으로 자신을 대변하기에 이른다. 이제 계급적 인식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행동양식’이나 ‘문화적 가치체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계급별 취향의 문제로 변모한다. 그렇게 ‘소비사회’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중심으로 한 ‘취향’이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구체적 행위 유발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결국 사회 전체를 보수적으로 만들게 된다.
미국의 경제사상가 앨버트 허시먼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보수화되어 가는 사회의 모습을 더욱더 근본적으로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국가기구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원리였던 ‘이해관계(interests)’를 공익의 핵심 구성 요소로 만들어가면서 정립된다. 이를 통해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간에도 서로 강력한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하는데, 사회 구성원들은 점차 상부구조의 변혁보다는 그 속에서의 안정감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블런이 유한계급의 금전과시적 취향의 확산으로 인해 경제적 판단을 따르는 인간형만이 가장 정상으로 제시된다고 판단했던 것처럼, 허시먼 역시 공사의 영역 모두에서 사회적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이성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적 쾌락에 빠른 속도로 익숙해지고 심지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양극화를 실제 직면하게 되었을 때조차, 국가기구의 형태 변화 내지 전복이 아니라 이해관계 중심의 사회적 구조가 흔들리지 않게 통제하는 더 강력한 정부를 원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의 심화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 지속이라는 경제적 환경은 이제 더 이상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충분조건도 아니며, 상부구조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사회적 연대의 필요조건도 되지 못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진보’란 자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을 통해 성취하는 자유로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혁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속에서 진보의 주체를 기획해 보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면, 자본의 구획 바깥에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떠도는 존재들을 먼저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보이지 않는 존재 : 영화 〈로니를 찾아서〉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의 경우에도 최근 코로나로 인해 그 숫자가 줄기는 했지만, 해외 거주자가 730만 명(2021년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숫자도 늘고 있으며 2021년 현재 195만 명으로 한국 거주 전체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주로 노동 환경의 변화에 따라 촉발하는 이주 현상은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자본의 속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먼저 완성한 국가들이 식민지 점령을 통해 경제 생산력을 뒷받침했었던 산업 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제국주의 형태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영역을 단순하게 지리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은 정보경제 패러다임에 근간을 둔 현재의 단일한 ‘시장’과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면서, 생산의 전 지구적 네트워크화를 통해 영토의 경계와 그 관리 방식에서 자유로운 탈영토화된 생산 방식으로 변모한다. 이는 IT 산업과 같이 웹에 기반한 특정 산업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조업이나 농업 등의 전통적인 인력 기반 산업에 이르기까지 지리적 거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각 생산부문들을 자본의 필요에 따라 재배치한다. 말하자면 모든 생산 형태들이 세계 시장 규모의 탄력성을 가진 네트워크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 시대 고용이 보장된 임금 노동은 자유 계약이나 파트타임 등의 비보장 노동 형태로 대체되어 간다.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노동 종사자들은 어느 때보다 ‘노동’이 개인의 책임으로 작용하는 반면에 스스로의 노동 환경 구성에 대한 요구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산업 조직 전반 역시 고도로 숙련된 소수의 전문직 관리자들과 고용이나 해고가 용이해서 직업 안정도가 극히 낮은 노동자집단으로 양분화되는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구조 변화를 ‘유연축적체제’라고 불렀다. 노동계층이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산업구성은 하청시스템이 강화되어 가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유연성’이 강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주노동은 그 자체로도 자본주의 산업구조가 촉발한 노동 형태이면서, 사용 시점부터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국가적 또는 문화적 배경을 소거한 채 어떤 생산 형태에도 구애받지 않고 사용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