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란은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에 날카로운 촉수를 드리워왔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는, 절실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학적인 기법과 장치를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소설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에서 이경란이 새롭게 주목한 한국 사회의 어둠은 바로 K-아재이다.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흔히 K-아재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은 될지언정, 정색을 하고 다루어야 할 한국 사회의 그림자로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4년 고독사 사망자 3,924명 중에 50, 60대 남성은 전체의 절반을 넘는 54%를 차지했다고 한다. 50, 60대 남성들은 조기 퇴직이나 사업 실패, 이혼과 사별로 뜻하지 않게 1인 가구가 되어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일종의 낀 세대인 이들은 사회 활동이 왕성한 청년층이나 정부가 관리하는 노년층과 달리 정책의 대상도, 복지의 대상도 아닌 소외된 세대가 되기 쉽다. 특히 이 세대의 남성들은 직장이 생활의 거의 전부인 사람들이어서 ‘명함이 없는 삶’이 닥치면 고립된 생활을 하기 쉬우나,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는 서툴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K-아재를 한국 사회의 어둠으로 주목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집은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라는 제목처럼, 소년들이 자라서 도달한 지점을 형상화한다. 거의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소년들이 소외와 비애를 훈장처럼 달고 도착한 거리는, 낡은 가부장제의 잔해와 자본주의의 비정한 영수증이 나뒹구는 춥고 어두운 뒷골목이다. 작가는 소위 ‘K-아재’로 명명되는 한국 사회의 중장년 남성들을 때로는 현미경으로 때로는 망원경으로 들여다본다. 이경란이 그려낸 인물들의 군상을 통해, 한국문학에서 소외되었던 ‘루저가 된 K-아재들’의 자리를 재확인하고, 그들의 몰락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어떻게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소설집을 읽는 보람이 될 것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는 기본적으로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나’는 증여받은 낡은 단독주택을 카페로 개조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수백 권의 책을 낱장으로 찢어 벽에 바른다. 의미로 가득한 아버지의 ‘책’을 단순한 사물인 ‘벽지’로 전락시키는 행위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모든 성장이 살부(殺父)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면, 이 소년은 성장을 위한 필수적이자 필사적인 투쟁을 벌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려고 바다 건너 떠돈 햇수가 무려 이십 년이지만, 결국 아버지의 낡은 집으로 되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더군다나 남자로 인해 사물에서 다시 책으로 부활한 벽지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화자는 그 찢어진 종이들로 자신의 공간을 빽빽하게 채움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아버지의 텍스트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 된다. 이것은 성장에 실패한 채, 아버지의 세계에 박제된 한 ‘소년’의 쓸쓸한 내면을 감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은 커다래진 몸을 이끌고, 여전히 소년인 채로 이 도시의 한복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밥 한번 먹어요」는 K-아재의 연애를 통해, 새로운 관계의 탄생 가능성을 탐문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나’는 결혼 한번 못해본 50대 남성이다. 경제적 곤궁함은 없지만, 대신 정서적 허기를 느끼고 있다. 그 빈자리를 북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정이라는 여성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이 작품은 K-아재가 품은 뒤늦은 연정(戀情)과 그에 수반되는 착각, 그리고 현실의 씁쓸한 뒷맛을 탁월한 상징과 심리 묘사로 풀어내고 있다. 모든 일은 ‘나’가 서울을 떠나 살기 시작한 바닷가 마을의 북 카페에서부터 일어난다. 이곳에서 ‘나’는 “딱 내 취향”(77쪽)인 한정을 만난다. 로시난테라는 카페 이름은 앞으로 펼쳐질 ‘나’와 한정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 로시난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가 타는 말 이름으로서, 돈키호테는 삐쩍 마른 로시난테를 명마라 착각하며 그 위에 올라탄 채 풍차를 향해 돌진한다. 주인공 역시 로시난테에서 자신의 생각을 망상의 수준으로 확장시킨다. ‘나’는 로시난테에서 만난 한정을 “찬란한 순금”(79쪽)이라고 여길 정도로, 순정을 향해 자신의 욕망과 꿈을 맘껏 투영하는 것이다.
이경란은 특이하게도 중년의 남성을 돌봄 노동의 주체로 등장시킨다.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은 백이라는 중년 남성의 돌봄 노동을 다룬 연작 소설이다. 「삐이유우우웅」의 백은 병원에 입원한 장모 준자 씨의 간병을 하게 된다. 간병인으로 병실에 투입된 백은 준자 씨의 기저귀까지 처리해야 하는 고단한 노동을 감내한다. 병원에서 백은 “똥”(113쪽)이라 불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간병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병원에서의 간병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흡연 구역에서 만나는 ‘분홍’이라는 인물은 간병의 고통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백이 분홍의 욕설을 따라 하며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은, 억눌린 감정의 배출과 동시에 자기 존재의 초라함을 확인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소파인간 외출하다」는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에 이어지는 작품으로서, 숨 쉴 수 없이 인간을 옥죄는 통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K-아재의 슬픈 존재 조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호종은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에서 준자 씨의 간병을 도맡았던 백과 동일인물이다. 호종은 백이 그러했듯이 형들 사이에서 자랐고, 아내 미영과 생활하고 있으며, 때때로 장모인 준자 씨를 간병했던 일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다. 호종은 백이 그러했듯이, “속절없이 소외당하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자기만 버려둔 채 자꾸 변화하는 세상이 야속”(180쪽)한 K-아재이다. 평소 아내 미영으로부터 하루 종일 소파에 붙어 지낸다고 해서 ‘소파인간’이라 불렸던 호종은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서스펜디드(Suspended)’라는 이름의 난해한 행위예술 프로젝트에서 알바를 한다. 실직 상태로 최근 “동전 하나 벌어보지 못한”(184쪽) 호종은 이 아르바이트를 ‘꿀알바’라고 여긴다. 가림판 안쪽에 앉아 손을 구멍 밖으로 내밀고 있으면 관람객들이 물건을 쥐여주거나 가져가는 퍼포먼스형 설치미술에 참여하는 것이다. 호종은 손을 거두거나 사나운 반응을 보이거나 자리를 뜨면 안 된다는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호종의 손에는 초콜릿바, 가방, 영수증, 커피컵, 심지어 침까지 쥐여졌다가 사라지며, 호종은 관람객과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혼란을 느낀다. 호종처럼 구멍 밖으로 손을 내민 여성 두 명이 호종의 앞뒤로 앉아 있는데, 두 명의 여성으로 인해 호종의 혼란은 더욱 커진다.
「K-아재의 깨물근」은 한국 사회의 중년 남성(아재) 집단이 겪는 경제적/사회적 몰락과 그 속에서 발현되는 비루하고도 처절한 생존 방식을 웃프게 그려낸 작품이다. ‘깨물근’이라는 단어는 고통과 자존심을 억누르며 견뎌내는 아재들의 내면적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예순넷의 은퇴자인 이탁은 역시나 그렇듯 실직 상태로 아내 눈치 보기에 골머리를 썩이며, 사둔 주식이 반 토막 나는 바람에 더욱더 무력감을 겪는 인물이다. 이탁은 아내에게도 아들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친구들에게조차 돈 때문에 속마음을 숨긴다. 「K-아재의 깨물근」에서는 이탁뿐만 아니라 그의 대학 동기 세 명을 등장시켜 지금 한국 사회에서 K-아재가 겪는 무력감과 소외가 집단적인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슈 파비용의 굴욕」은 작가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강렬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근대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우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슈 파비용의 굴욕」은 백 년 묵은 프랑스 와인인 ‘르 파비용(Le Papillon)을 의인화하여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가 전면화된 현대 사회를 풍자하며 교훈을 전달한다.
「최소한의 나」는 교환가치가 전면화된 현대 사회가 최종적으로 가닿을 디스토피아를 형상화한 소설이다. 그 묵시록적 풍경 속에서 소비지상주의와 환경 파괴는 극에 달하며,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비인간의 상태로 전락한다. 이 소설의 바탕에는 ‘문명의 찬란한 외면/문명의 더러운 이면’이라는 이분법이 놓여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고층 아파트’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쓰레기 산’이다. 이러한 이분법을 낳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일은 돈 때문에 벌어진다”(46쪽)는 문장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다름 아닌 자본이다. ‘쓰레기’는 실제의 쓰레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이 사회의 약소자를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