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밖 시장으로 상인들을 모았다면, 안으로는 전국의 부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정조는 수원에 도착한 부자들에게 이자 없이 자금을 빌려주고, 인삼과 갓 판매권까지 안겼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혜택이라면 신도시에 갈 만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장안문에서부터 행궁 앞 사거리까지 팔부자 거리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누가 살았는지 정확히 확인하긴 어렵지만, 100~300평 규모의 주택들 주변으로 어물전과 염전, 비단을 파는 입색전까지 다양한 상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팔부자 거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_41쪽. 수원X수원화성─백성을 사랑한 임금을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은 물론 성 밖 십 리까지도 무덤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안에 살던 망자가 황천으로 가려면 일단 성 밖으로 나가서 4㎞ 이상 멀어져야 했습니다. 이때 망자 전용 출구로 지정된 2개의 문이 바로 도성 남쪽의 광희문과 서쪽의 소의문이었습니다. 광희문은 저승길의 첫 번째 관문이자 이승과 작별하는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먼 길 떠나는 망자의 평안을 바라는 유가족은 하늘과 인간을 잇는 무녀를 불러 노제(路祭)를 치르곤 했습니다. 무녀에게 곡소리가 끊일 일 없는 광희문 앞은 언제나 일거리가 있는 장소였던 셈이지요. 그러자 신속하게 손님을 만날 수 있는 ‘굿세권’ 인근에는 나날이 신당이 들어섭니다. _46~48쪽. 서울X신당동─잘 가시오, 안녕을 비는 동네
1560년대, 소위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대학자의 교육을 받기 위해 서당을 찾은 선비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뚝 솟은 으리으리한 대문이 서 있다면 쉽게 들어설 수 있을까요? (중략) 재밌는 건 공들여 지은 건물인 것 치고 균형미나 완성도가 느껴지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단 세 칸의 크기가 균일하지 않습니다. 한눈에 봐도 맨 오른쪽에 자리한 대청마루 암서헌이 특히 넓습니다. 그러고 보니 암서헌의 지붕도, 바닥의 평상도 비대칭적으로 늘린 흔적이 뚜렷합니다. 마루 공간이 교실이었음을 미루어보면,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온 유생이 많아져 증축한 흔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_77~79쪽. 안동X도산서원─조선의 혁신 도시, 성리학 싱크 탱크
벽수(碧樹) 윤덕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의 숙부입니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 이후 내장원 소속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며 권력을 맛본 그는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자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시작합니다. (중략) 개발로 남아 있던 흔적마저 사라져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는 듯했지만, 1973년 박노수 화백이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을 매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해방 이후 국내에 만연한 일본 화풍에 대항하며 “전통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낸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었죠. _175~176쪽. 서울X서촌─애국과 매국, 엇갈린 선택이 교차하는 동네
최흥종은 스스로 고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뒤, 무등산으로 들어가 은거합니다. 자신의 아호(雅號)를 오방(五放)으로 짓고, 살던 집을 오방정(五放亭)이라 명명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오방은 5가지를 버린다는 뜻으로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사망통지서를 보낸 이후 그는 약자들과 연대하는 삶 이외의 것은 모두 덜어낸 채 살아갑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선이 빛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잃어버린 것은 찾고 난 다음이 중요한 법이지요. 해방 후 도움이 필요하다며 무등산 자락을 올라 오방정을 찾은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입니다. _210~213쪽. 광주X최흥종─장터 건달에서 시대의 어른으로, 한 자유인의 일생
당시 서성로 일대에 거주하던 지식인과 예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예술을 통해 억압받고 암울한 시대를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예술에 향토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강하게 글로 울분을 토했던 이상화는 우리의 말과 글을 잃지 않기 위해 순한글을 사용하고, 대구의 방언을 썼습니다. 윤복진과 박태준은 순수한 아이들이 아름다운 한글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동요를 만들었습니다. 서동진은 줄곧 대구의 풍경을 따스하게 그리며 수채화로 희망을 전달했습니다. 그의 제자인 이인성은 조선이 일본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파란 하늘, 붉은 땅과 같은 조선만의 색과 분위기를 화폭에 얹었습니다. _235쪽. 대구X대구역 일대─모던 대구, 그 시절 대구는 예술이었다
한편 1931년 12월 20일, 해녀 대표로 선출된 부춘화와 부덕량, 김옥련은 해녀조합에 전달할 조건을 정합니다. 해녀의 의사와 상관없는 지정 판매를 금할 것, 계약보증금을 생산자인 해녀가 보관할 것, 미성년자와 40세 이상 고령 해녀 혹은 투병 중인 해녀의 조합비를 면제할 것, 조합에서 사용한 재정을 공개할 것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지켜지지 않자 해녀들은 전복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빗창을 들고 세화 오일장으로 향합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터에서 해녀들은 직업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연설을 펼쳤습니다. (중략) 해녀들의 기세에 당황한 면장은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얕은 술수일 뿐이었죠. _259~260쪽. 제주X여성 독립운동─바당에서 기어코 배워낸 숨, 독립의 숨비 소리
이 무렵 일본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6세가 경주 고분 발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동양 고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제는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던 경주의 고고학적 가치와 유물을 황태자에게 소개하며 방문을 권합니다. 그리고 황태자가 서봉총 발굴에 직접 참여한 가운데 봉황 장식이 있는 금관이 출토되죠.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말입니다. 이 각본의 하이라이트는 고분의 작명입니다. 일제는 스웨덴 황태자와의 합작을 기념하며 고분 이름을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 봉황 장식의 금관을 뜻하는 ‘봉(鳳)’을 붙여 ‘서봉총’이라 최종 결정합니다. 일제에게는 서봉총 금관이 스웨덴 황태자와의 스토리를 지닌 의미 있는 물건이 된 순간이었죠. _273~275쪽. 경주X역사유적지구─역사를 훔친 사람들, 도굴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