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랐다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여전히 글을 쓸까. 쓰지 않았을까. 내가 자라온 환경이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기에 그 장소성이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언제나 의문스럽다.
어떤 과정이 있었든, 지금의 나는 쓰는 존재가 되었구나. 그런 사실이 안심이 되기도, 슬프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좀 슬픈 사람이니까. 슬프지만 춤추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장소성이라는 것」 중에서
내가 시를 쓰는 건, 내가 시인이 된 건. 세상 어디에서, 시를 쓰는 사람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나도 모르는 커다란 스푼이 나의 마음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나의 한 구석이 강제로 비워진 것 아닐까. 아니면 길거리를 쏘다니며 어딘가에 나 자신의 영혼이 발 빠지는 줄도 모르고 흘려버리고 돌아온 것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마음의 결손.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단지 나의 사라진 부분에 대해 자꾸, 거듭해서 말하게 되는데. 어째서인지 그 상실이. 단순히 ‘나의 없음’이, 미래에 가서도 똑같은 일이 되어서. 그러니 예언이 되어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되풀이 되는 거다.
그렇게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세상 어딘가에서 반복될 우리의 슬픔. 그게 예언이 될 거라는 점이. 나는 어쩐지 두렵다.
「결손 예언」 중에서
나는 내가 느낀 슬픔의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마도 과거의 내 모습을 타인으로 바라본 게 아닐까 싶다. 그 어린 날의 자신이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일을 짐작하고,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면서 화해를 한 순간 눈물을 터트리게 된 게 아닐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좀 더 정확하게 내 슬픔을 독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의 슬픔을 잘라내서 무대 위에 올려둔다면, 누군가는 그 이유에 대해 짐작할 수도 있겠지. 그게 바로 문학의 쓸모라는 것일 테고.
「낮은 곳으로 기우는 눈물」 중에서
나는 시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밀하게 연결된 스승이 마땅히 없었고, 서로 간에 시를 면밀하게 봐주는 가까운 지인도 없었다. 대학에 가기를 성공하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니 나의 글은 온전히 나만이 스승이 되어야 했고, 온전히 나만이 글을 첨예하게 바라볼 시선을 지녀야 했다. 어떻게 보면 분명 고이고 있었다. 한 바닥도 되지 않는 우물 안에서, 내 우물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도 없었으니까. 단순히 나는 나를 믿었고, 나의 글쓰기를 애정했고, 나의 일상을 가만히 즐겼다. 그냥 그러면 될 일이라고. 어차피 등단을 하든, 하지 못 하든 일찍이 계속해서 시를 쓰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러니 나의 반려는 길고 긴 남루함. 자극보다는 정적인 무언가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혼자이기에 얻은 것」 중에서
왜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게 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더라면 슬픔 따위 모르는 채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먼 과거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을 아예 도려내는 수술을 했다는데. 가끔 모두가 감정이 없다면 더 나은 세계가 되었을까, 상상하곤 한다. 모두가 이성만이 있는 세계. 그건 얼마나 황홀한 지옥일까? 끓는 용암과 지옥불만 없을 뿐, 모두가 악마와 같은 마음을 가진 세계.
「상실 후에 만나는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