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장진홍의 굵고도 짧은 삶의 여정은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의 씨앗이 되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내어 흙 속에 묻힌 진주알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그의 삶을 마주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가 한 영웅의 일대기를 넘어, 불의에 맞선 선조들의 희생 앞에 경건하게 머리 숙이는 숭고한 의식이 되길 바란다.
[책 속으로]
임시정부의 방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하는 단체가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의열단(義烈團)이었다. 약산(若山) 김원봉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창립했다.
의열단은 “오로지 무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파괴와 암살’을 기본전술로 삼았다. 단재(丹齋)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행동강령으로 삼은 의열단은, “폭력은 민중의 혁명적 본능”이라 외치며 거침없이 일제의 심장을 겨냥했다. 당시 유림의 지도자였던 김창숙은 의열단의 급진적인 폭력투쟁노선을 옹호했다. 이는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이념과 방법을 초월한 연대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p. 59, ‘의열단의 맥을 잇다’ 중에서
낡은 냄비와 괭이가 쇠망치질에 산산조각 나고, 쇳조각은 다이너마이트와 함께 빈 깡통 안으로 들어갔다. 재를 가득 채우고 도화선을 연결하자, 한 손에 들어갈 소형 자결용 폭탄 하나와 대형 폭탄 네 개가 태어났다. 그 쇳덩이에는 조국을 향한 분노와 희망이 함께 눌러앉아 있었다.
장진홍은 곧장 나무상자를 곱게 짰다. 벌꿀 선물상자처럼 꾸민 뒤, 겉면에는 황진박이 써준 발송인과 수신인의 쪽지를 붙였다. 발송인에는 ‘대구부 남산정 39번지 길전상회(吉田商會)’라는 가명이 쓰였다. 상자 속에서 쇳조각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묘하게 차가웠다.
-p. 100, ‘폭탄으로 맺은 굳은 맹세’ 중에서
이 사건은 동아와 조선일보 등에 ‘조선 전체로 신기록을 만든 미증유(未曾有)의 사건’이자 ‘예를 보지 못한 엽기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일제는 경악했다. 자신들의 통치가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일제는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과를 중심으로 특별 수사본부를 조직했다. 1,6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범인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초기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폭탄을 던진 자는 종적을 감추었고, 경찰의 시선은 오직 붙잡힌 박노선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림자처럼 사라진 장진홍의 뒤를 쫓기 시작한 이는 바로 친일 형사 최석현 경부보(警部補)였다. 최석현은 일본인 수사 책임자 후쿠다 고등과장 휘하에서 수사반장을 맡고 있었다.
-p. 109, ‘조선은행을 응징하다’ 중에서
오사카에서의 은신은 비교적 안전했으나 마음만은 고요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작업대 위에 일본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도시들을 짚었다. 오사카, 히로시마, 요코하마, 그리고 마지막에 멈춘 곳 도쿄.
그 한가운데, 치요다구 카스미가세키 2초메 1-1번지. 바로 동경경시청이 있었다. 일본 제국 경찰력의 심장부이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거대한 그물망의 중심이었다. 조선에서, 만주에서,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싸우던 동지들의 피와 절규가 이곳에서 퍼져나갔다. 그 벽 안에는 고문실이 있었고, 무고한 이들의 뼈가 꺾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곳을 폭파한다.”
-p. 130, ‘오사카의 깊은 밤’ 중에서
장진홍은 고문대 위에서도, 몽둥이 아래에서도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외쳤다. 그에게는 심문실조차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1930년, 그는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법정 안은 헌병과 경찰로 가득했다. 쇠사슬에 묶인 채 피고석에 선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일본인 판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날, 장진홍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p. 157, ‘절명의 항거’ 중에서
장진홍의 행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쫓던 일제 악질 경찰 최석현의 수기 ‘대구 조선은행 지점 폭탄 범인을 법정에 보내기까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수기는 친일 행적을 미화하고 있으나, 동시에 한 독립투사의 위대한 발자취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비극적 사료가 되었다.
우리는 이 모순된 기록 속에서, 극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행위를 홀로 짊어진 장진홍의 희생정신을 목격한다. 그의 의거가 단독범행으로 기록된 것은, 한주학파라는 거대한 정신적 연대가 그의 숭고한 침묵 속에 오롯이 숨겨졌음을 의미한다.
-p. 205, ‘맺는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