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중편선 002 『이름들의 바다』
스릴러, 판타지, SF, 미스터리, 순수 문학을 고루 다뤄오던 소설 브랜드 ‘그늘’에서 국내 소설 중편선을 기획했다. 우리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반짝이는 작품을 모아 차례로 선보인다. 세상의 모습을 담은 문학이라는 거울은 우리를 비춘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밝은 길잡이로 독자의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저마다 에너지를 가진 젊은 작가들이 삶을 꺼내 만든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장르에 상관없이 세상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모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이 책은 언제 어디에서든 펼칠 수 있다. 이야기가 일상에 스며드는 동안 작은 파동이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소설을 가로지르는 다정한 통찰을 책의 등에 담았다. 시리즈 도서를 책장에 모아 꽂으면 힘이 있는 각각의 서사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짓게 된다. 기본에 충실한 흑백의 이미지는 독자들의 내면에서 조화를 이룬다.
그늘 중편선 시리즈는 장편소설이 지닌 강렬한 서사와 단편소설이 가진 밀도의 매력을 오늘의 문학 속으로 동시에 되불러 재해석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단숨에 읽을 정도로 짧지만 짜임새 있고, 단편소설보다는 길기에 훨씬 정교한 서사를 선사한다. 한 호흡으로 이어가는 서사의 힘, 이야기의 응축된 의미가 독자에게 닿아 짧지만 오래 남는 울림을 전할 것이다.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꼭 맞는 언어를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바란다.
이름에서 타인의 온도를 느끼는 여자,
어느 날 ‘겨울’이 되어 버린 연인
주인공 홍해수는 남들에게는 없는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바로 타인의 이름을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고유한 온도가 피부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온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 방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연인이 ‘겨울’이 된 채 나타났기 때문이다. 연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어느 날 해수는 동생 ‘해윤’에게서도 이균과 똑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겨울의 냉기를 감지한다. 동생마저 ‘겨울 인간’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은 그녀를 무의식의 세계이자 꿈의 공간인 ‘레브’로 이끈다. 현실과 무의식의 심연을 오가며 단서를 추척하는 해수 그리고 379번이나 반복된 꿈속의 만남, 기묘한 문지기가 던지는 수수께끼…. 해수는 흩어진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도착한 공간에서 마침내 이름의 무게를 마주하게 된다.
『이름들의 바다』는 현실과 무의식의 환상을 오가며 진행된다. 윤신우 작가의 세계에서 현실의 결핍은 무의식의 공간인 레브를 통해 채워진다. 주인공이 마주하는 기묘한 문지기와 상징들은 해수가 현실에서 외면했던 진실의 파편들이다. 자신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타인의 얼어붙은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려는 주인공의 사투는 독자를 뜨거운 구원의 이야기로 안내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초능력을 영웅의 서사가 아닌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는 매개로 활용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연인이 내뿜던 혹한의 냉기를 체질의 변화쯤으로 치부했던 해수의 무지는 오늘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우리의 자화상과 닮아 있다. 그녀가 느꼈던 온도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누군가의 상처이자 타인이 보내는 구조 신호인 것이다. 작가는 “나는 너를 안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오만함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타인을 향한 애정 어린 관심이 아닐까.
가장 가까운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추적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연인 ‘이균’을 통해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냉기를 뿜어내는 ‘겨울 인간’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한 해수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의 겨울을 다시금 직시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며 웃는 동생의 얼굴과 그와 상반되게 전해져 오는 시린 냉기. 그 간극에서 오는 긴장감이 이야기의 동력이 되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독자는 해수와 함께 무의식 속에서 단서들을 마주하며 ‘겨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동생의 진실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이 책은 이름 뒤에 숨겨진 타인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해수가 만난 소설 속 ‘겨울 인간’들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부당한 폭력과 차별, 혐오 속에서 마음이 얼어붙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다. 레브의 문지기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타인의 비명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영영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소통의 부재 속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이들의 상처는 쌓여만 가고 그렇게 겨울이 된다. 그러나 작가 윤신우의 세계에서 그 겨울은 마냥 절망적이지 않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도 미세하게 남아 있는 따스함과 희망을 포착한다.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흔적을 더듬어 가는 여정을 통해 우리들은 연결된다. 아픈 진실을 마주하는 것조차 사랑의 한 형태일 것이다.
『이름들의 바다』는 타인의 고통을 섣불리 위로하지 않지만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겨울의 서늘함 대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우리가 견뎌내야 할 관계의 온도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몇 도인가. 그리고 나의 이름은 몇 도인지를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따스한 구원의 온도가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간절한 진심이 이 책에 넘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