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왁스로 잔뜩 힘을 준 머리, 쫙 빼입은 정장, 그 위로 영롱하게 빛나는 금빛 세무사 배지…. 거울에 비친 코털마저 제거하면 출근 준비가 끝난다. 출근길에 ‘전단지 돌리기’, 속칭 ‘돌방 영업’을 시작한 지 3일째. 전단지 영업은 첫인상이 중요하다 보니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출근하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그간 눈여겨 봐왔던 24시간 순댓국집.
“어서 오세요!”
이른 마수걸이 생각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장님. 자리를 안내하려다 전단지 내미는 손을 보고는 이내 표정이 차가워졌다. 정장에 서류 가방을 든 모습이 영락없이 영업사원이다. 다음은 그 옆 카센터. 전단지를 흘겨보던 사장님의 입이 씰룩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양도세 좀 알아요?”
#9쪽_눈물 젖은 전단지
개업 준비가 한창인 식당이라 마실 것이 없다며 사장님은 병맥주를 꺼내 왔다. 한겨울 대낮부터 차가운 맥주는 아무래도 아니었지만, 첫 만남부터 거절로 시작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맥주잔을 들었다. 그렇게 벌게진 얼굴로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상담.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기에 곧 계약이 이뤄질 것 같았다. 그때 사장님의 한마디.
“다른 데는 기장료가 3개월 무료라던데, 여기는 몇 개월 무료예요?”
다른 곳은 3개월 무료라며 운을 띄운 사장님. 타 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많은 개월 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무료’라는 단어를 들은 술술이의 얼굴은 굳어버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다물고 있던 술술이의 입이 열렸다.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함이 강하게 묻어났다.
#36쪽_“여기는 몇 개월 무료 기장이에요?”
내용 확인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떨리는 마음에 의뢰인의 연락처를 누를 수 없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그제야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이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의뢰인께 믿음을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이상 이번 의뢰는 이어가기 어렵겠습니다. 부디 다른 세무대리인에게 맡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꼴이었다. “네깟놈이 무슨 세무사냐?”라는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부끄러움이 너무나 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이런 상황에서 의뢰를 맡는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일하다 보면 그러실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맡아주시죠.”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의뢰인이었지만, 내 마음속 죄책감은 더 커져만 갔다.
#80쪽_세법이 만만해?
어느새 점심시간. 술술이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던 과장님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거래처가 적자라 결손금 소급공제를 할까 생각하니 환급 금액이 커서 세무서에서 올 연락이 걱정되네요. 업체에 말하지 말고 그냥 이월결손금으로 돌리자니 마음이 불편하고요.”
과장님의 눈이 반짝였다.
“세무사님, 그런 상황에서는 ‘불편하더라도 옳은 길을 고르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촌철살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과장님의 일침이 날아들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지레 겁을 먹거나, 귀찮다고 피하면 반드시 더 큰 후회로 돌아오니 그럴 때는 정공법으로 헤쳐나가자고 그간 여러 번 강조하지 않았던가. 말은 쉽지만 막상 그 상황에 맞닥뜨리니 머리가
하얘지고,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그동안 떠들어 댄 ‘젤리처럼 말랑했던 나의 다짐’이 직원들에게는 ‘무쇠같이 단단한 다짐’으로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122쪽_최고의 방법
결과적으로 ‘해외현지법인명세서’와 ‘해외현지법인재무상황표’를 제출하지 않아 2,0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금액, 2,000만 원…. 흰머리가 10개는 솟아날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만, 앞서 담당자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 세무서 입장에서도 2,000만 원에 이르는 과태료를 곧이곧대로 부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 해외로 송금된 금액이 0원이니 영업이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했고, 해당연도의 ‘해외현지법인명세서’와 ‘해외현지법인재무상황표’를 작성했더라도 자본금이 없어 재무상태표나 손익계산서, 이익잉여금처분계산서에 기재할 금액이 없었다. 송금액이 없으니 역외 탈세 방지라는 법령 취지에도 반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같은 국제적인 천재지변, 곧 불가항력적 상황이 과태료 면제사유(제5호)에 해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60쪽_2,000만 원짜리 점심
돌이켜 보면 회사는 내게 사회생활의 출발지이자 세무사로서의 기본을 다지게 해준 뿌리나 다름없었다. 떠나는 마당에 거래처까지 챙겨 나간다는 건 함께한 동료와 믿어준 대표님에 대한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하니 그쯤이 뭐가 대수랴 싶기도 하고…. 괜히 말을 꺼냈다가 근로계약서상 ‘손해배상책임’이 문제로 불거질까 걱정도 되었다.
‘말하지 않고 몰래 이관시킬까?’
‘괜히 말 꺼냈다가 한 업체도 못 가지고 나가면 어쩌지….’
깊은 고민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평소 아버지와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넌지시 상황을 말씀드렸다.
“이놈, 그렇게 살면 안 돼. 당연히 말해야지!”
내게 떨어진 건 기대하던 현답이 아닌 천둥 같은 불호령이었다. 자식 사정도 모르고 원칙만 강요하는 고지식한 아버지가 바로 내 아버지였다니….
#193쪽_문을 두드릴 용기
아들이 아버지의 지분을 전부 상속받아 남매 사이가 다시 보지 않을 만큼 멀어진다면, 이후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본인 지분이 전부 딸에게 상속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반드시 5대 5로 상속을 진행해야 했다. 곧장 법무사님에게 전화해 확인해 보니 아직 취하가 가능한 상황.
가족이 다시 모여 ‘상속재산 분할협의서’를 새로 작성하면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가족 사이를 회복할 정말이지 마지막 기회였다.
“바로 아드님께 전화부터 하시죠.”
어르신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저 일하고 있어요. 바빠요.”
…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제3자인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노구를 이끌고 세무사를 찾은 어머님의 결심과 5대 5 지분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정리해 말씀드리니 그제야 아들도 내용을 이해했다. 전화기를 돌려받은 어르신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전했고 이내 아들의 마음도 녹아내렸다.
#228쪽_카운슬러가 된 술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