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 과거에 단단하게 붙들려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현재를 애틋하게 물들이는 그리움의 향수가 아니라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처럼 일상을 불안으로 잠식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과거의 상처와 고통 속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처절한 생존자인 듯이 보인다. 흔히 지난 과거에 집착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에 충실하게 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당부의 말 자체가 이미 끈질긴 과거와 막연한 미래 사이에 낀 인간의 곤혹스러운 현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 일들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막연함이 지금의 나를 흔든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시간은 부패를 가져온다. 애도하지 못하는 삶은 멜랑콜리에 잠식된다. 부희령의 소설은 그렇게 부패되거나 멜랑콜리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뜨거운 생존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내밀한 사연, 가족사적이거나 역사적인 과거의 기억들이 인물들의 현재를 침범한다. 그 기억들은 심리적 불안이나 결핍감만이 아니라 몸의 증상으로 발현되고, 마침내 실존의 파열로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의 주인공은, 사십여 년 전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육십이 다 된 여성 작가이다. 여자는 과거와 현재, 역사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이 교차하는 가운데, 긴 세월을 ‘너’와 ‘나’로 분열된 채로 살아왔다. 그 이인칭의 호명 속에서 ‘너’는 ‘나’가 되지 못한 채로 낯설게 괴리되어 있다. 여자의 삶을 구속해온 과거의 원점은 이십대 대학 시절이다. 그때 여자는 대학의 도서관과 거리의 광장 사이에서 흔들리며 번민하고 있었다. 기형도의 「대학 시절」이라는 시에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라고 쓰인 것처럼, 여자는 그 우악스럽고 섣부른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섬세하고 여린 영혼의 청년이었다. 독재자가 죽고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정치적 환란의 시대, 그 혼란의 청춘기를 보내던 여자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유토를 만난다. “교정에서 방독면을 쓴 고릴라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인간 사냥을 벌여도 도서관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간 같은 컴퓨터와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는 이도 있었다. 유토는 그런 사람이었다.”(24쪽) 둘은 관심사도 생각도 다른 사람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여자의 마음이 유토에게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끔찍한 현실을 망각하고 싶은 마음, 그런 도피의 심리가 고고한 관념의 그 ‘마의 산’을 닮은 유토에게로 향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무언가를 대체하는 존재, 그 도피처를 좇았던 마음은 오래가기가 어렵다. ‘마의 산’을 내려온 여자는 계략과 음모가 벌어지는 살벌한 현실을 마주하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의 퇴행 속에서 벌어진 내란과 외세의 개입을 둘러싼 정치적 격동이었다. 제국의 합병 여부를 두고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부정 투표함을 발견하고 밤새 그곳을 지키는 자리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그 일을 하게 했던 친구 자오의 당당함과는 달리, 여전히 섣부르게 확신할 수 없는 세심한 영혼이었다. 여자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고 국가는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곧이어 총독의 포고령이 선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고문을 받고 학살당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총독의 포고령이 예고되자 여자는 과거의 그 폭력적인 기억을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마침내 질적인 도약이 이루어진다. 여자가 두려움을 이겨내며 비밀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사십여 년 전에 부정 투표함을 지키던 그때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너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안고 편의점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34쪽)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 생존의 절박함은 부희령의 소설 전반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주제어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술자리의 옆 테이블에서 남자들이 나누던 대화의 결론도 그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잖아, 잘 살아왔잖아.”(12쪽) 여자는 좁은 철문을 통과해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게로 다가가며, 화려하고 거대한 고층빌딩에서 자기를 개미처럼 내려다볼 사람들을 생각한다.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의 여자가 유토나 자오와 선명한 성격적 대비를 이루듯이, 「출간기념 파티」에서 주인공 수녕은 강 화백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수녕은 그 출처를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결핍 속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하지만, 정작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고 신명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의 여자 역시 작가였고, 온갖 번민과 잡념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발버둥 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녕 역시 너무 여리고 예민하고 세심한 사람이라서, 온갖 ‘생각’들을 통해 낯선 세계의 공포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의 경로」에서 여주와 미연은 부모의 재혼으로 의붓자매가 되었다. 이들은 친부모의 한쪽을 잃은 상태로 각각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이른바 정상가족을 이루었지만, 끝내 가족사의 근원적 결핍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열되고 말았다.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그 파열의 양상은 규, 여주, 미연으로 이어지는 그들 각자의 시점 교차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여주와 미연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각자의 결핍을 들추어내고, 마침내 그들은 파열과 파국으로 이끌려간다. 그러나 결핍을 앓는 가운데 그것을 채워내기 위한 욕망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여주와 미연은 서로 다르지 않다. 여주와 미연이 비대칭적인 대비를 이루며 그 내적 갈등의 힘으로 서사가 추진되는 것은,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이나 「출간기념 파티」와도 마찬가지다.
「전망 좋은 방」에서 민수와 주연은 영화라는 몽상의 예술에 이끌리던 대학 시절을 함께 보냈던 선후배 사이이다. 몽상에서 깨어나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된 민수와는 달리, 주연은 오래전 후배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찬투」에서 향숙의 삶이야말로 공동체적 윤리의 기쁨으로 가는 궤적을 잘 보여준다. 그는 현실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꽃과 별을 꿈꾸던 청춘의 시절과 작별하고 첫사랑마저 버렸지만, 결국 크게 더 나을 것이 없는 삶을 살아온 중년의 여성이다. 그러나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 했던 돌봄의 노동 속에서, 자기로부터 타자에게로 가는 책임의 윤리에 눈뜨게 된 것처럼 보인다. 생존을 위한 악착같은 삶 속에서 점점 더 자아에 매몰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진 세파를 견뎌내며 살아남은 향숙은 어느새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반면에 출산을 한 딸을 간병하는 남희라는 초로의 여성은, 생존의 절박함에 치여서 악착같이 살다가, 결국 그 삶이 오직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되어버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봄잠」은 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제주 4·3의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 폭력의 기억에 붙들려서 한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자의 이야기다. 팔십이 넘은 나이의 여자는 강 여사로 불리고 있지만, 난리 통에 열 살이 채 안 된 자기를 구해주었던 할망 강백주의 이름으로, 또 그 할망의 죽은 딸 고명진의 이름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할망 강백주는 덤불 속에서 죽어가던 여자를 구해냈다. “할망은 살아라, 살아나라, 살아지면 살아나라, 중얼거리며 토닥였어요.” 그러니까, 역시 여자는 생존자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존이라는 주제는 부희령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
「마중」에서는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남자의 묻어두었던 과거와, 그 딸 양경이 오랫동안 떨쳐내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린 기억을, 각각의 시점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남자는 사업을 해서 한때 번창했던 시절도 있지만, 사기를 당하는 등의 곡절 끝에 수도권의 변두리로 이사를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아흔이 넘은 현재의 남자에게 미래의 시간은 촉박하고 과거의 시간은 애틋하다. 미래의 문이 닫히고 있는 가운데, 과거의 기억들이 그의 현재를 덮쳐온다. 남자는 전쟁 때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탈영해 숨어 있다가 만난 어느 처녀의 기억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이 처녀는 지금의 아내가 아니다. 남자는 그 처녀에게 송도원의 붉은 벽돌집 동순남 씨를 찾아가 자기가 여기 숨어 있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처녀는 알았다고 하면서 떠난 뒤에, 남자는 꿈속에서 할머니가 짜주던 염소젖을 따뜻하게 데워 마셨지만, 추위와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바로 그 허기, 즉 어떤 절대적인 결핍에 관한 이야기였다. 허기진 남자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남자의 허기진 삶은 딸의 삶까지도 허기지게 했다. 그렇다면 그 허기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이 남자처럼 할머니와 처녀를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채워질 리는 없다. 양경처럼 분노와 미움의 에너지로 힘껏 원망한다고 해서 채워질 리도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의 어떤 기억 속 상처와 결핍, 그 존재론적 허기에 대한 자기만의 지나친 ‘생각’에서 헤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 즉 자기 곁에 있는 존재들과의 우정 어린 만남과 교류이다. 그렇다면 나와 네가 분열하는 비대칭성의 길이 아니라 내가 곧 네가 되는 대칭성의 길, 「전망 좋은 방」의 주연과 「찬투」의 향숙과 「봄잠」의 강백주가 그들의 허기진 삶으로부터 나아간 그 길을 함께 따라가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부희령의 소설은 사람을 과거의 어떤 기억 속에서 자꾸만 나르시시즘적인 생각으로 고착시키고 고립시키는 것, 그 ‘마의 산’으로부터 내려오려는 생존의 의욕과 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