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었다. 최고급 자재를 사용한 내부구조는 넓은 거실에 벽난로가 있는 서구식 설계였다. 수돗물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 멀리 떨어져 있던 뒷간이 집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난방과 취사를 하던 시절에 최신식(?) 연탄보일러 시설을 갖춰 주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마포아파트의 입주가 세인의 관심 속에 시작되었으나 임대 실적이 매우 부진해 10%도 채우지 못했다. 집단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아파트가 아무래도 낯설었던데다가 임대료도 비쌌다. 임대보증금 4만 원에 월임대료 3,500원은 월평균소득이 6,600원이었던 도시근로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겨울에 입주를 하여 연탄가스 중독 위험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입주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 p.21, 「원조 아파트는 언제 세워졌을까」 중에서
이러한 ‘깡촌’ 말죽거리에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1968년부터였다. 당시 중요 행정구역인 영등포구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영동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여기에 속한 역삼동, 논현동, 서초동 등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 땅값은 대체로 세 차례에 걸쳐서 뛴다. 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오르고, 착공될 때 오르고, 완공 시점에 또다시 높이뛰기를 한다. 여기에 월남특수로 시중에 돈이 넘쳤던 1967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구체화되자 예정지 주변으로 시중의 투기성 자금이 몰리면서 돈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 p.34, 「강남 개발과 말죽거리 투기 열풍」 중에서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였던 동빙고동 일대는 부유층이 모여 사는 곳으로 집값이 3,000만 원을 넘는 궁궐 같은 호화주택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곳을 ‘도둑촌’이라 불렀다. (…) 비난이 거세지자 호화주택 거주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바로 옆 이촌동의 대형 맨션아파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민간 주택업체들이 지은 맨션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려 그동안 분양이 안 돼 주눅들었던 분양 관계자들이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신바람이 났다. (…) 이처럼 도둑촌 파동으로 고급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이는 아파트 공급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서민들의 주택난 해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맨션아파트는 값이 비싸 중산층을 대상으로 분양됐기 때문에 중산층 문화가 꽃을 피웠다. --- p.55, 「황금알을 낳기 시작한 아파트」 중에서
열흘 후에 AID(미국 국제개발처)가 보증하는 차관으로 반포아파트 22평형을 무주택자들에게 분양하면서 입주금을 전례 없이 대폭 낮추었다. 분양가격은 360만 원이었는데 270만 원을 장기분할상환 조건으로 융자를 받을 수 있어 90만 원만 있으면 입주가 가능해 인기가 있었다. (…) 손꼽아 기다리던 공개추첨일, 가수요자를 포함한 많은 신청자들이 넓은 마당에 운집하였다. 시간이 되자 제비뽑기로 입주자를 결정하였는데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아야만 했다. 입주 조건이 워낙 좋다 보니 추첨이 끝나자마자 5년간 전매금지 조항을 비웃듯 인근 복덕방에서 50만 원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가 되었다. 분양 현장에서 아파트로 돈벌이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 p.80, 「1막 1장, 호황 속의 제비뽑기」 중에서
아랍 산유국들이 원유값 인하 움직임을 보이자 아파트 시장이 이내 썰렁해졌다. 그동안 아파트값을 지탱해온 물가상승이라는 버팀목까지 무너져 버린 것이다. 팔려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살 사람은 드물었고, 복덕방 거래장부에 매물이 빼곡히 적히며 거래가 뚝 끊겼다. (…) 주택 시장에서는 집값이 한번 오르면 쉽사리 값을 낮춰 팔려고 하지 않는 보수적 거래 관행을 보인다. 이처럼 집값이 좀처럼 낮아지기 어려운 하방경직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낮은 주택보급률로 인해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고, 물가가 오른 만큼 매번 집값도 뒤따라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투기성 가수요가 일시적으로 집중되면서 부풀려진 거품 가격은 예외였다. 거품 가격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가라앉게 마련이었다. --- p.91, 「1차 파동의 마무리)
1974년 양도소득세가 신설되면서 기존 아파트는 아무래도 거래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양도소득세는 파는 사람에게 부과되기 때문에 수요억제 효과는 없었으나 시장이 중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신축 아파트만은 예외였다. 아파트값이 안정되자 기존 아파트보다 내부구조와 마감재가 훨씬 좋아진 신축 아파트에 관심이 높아지며 약간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가 되었다. (…) 당시 민영아파트는 주공이나 서울시에서 짓는 서민아파트처럼 무주택자나 1가구 1주택자를 우선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약금 200만 원 내지 300만 원으로 당첨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중소형 아파트는 30만~50만 원, 대형 아파트는 50만~80만 원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가 되었다. --- p.108, 「2막 1장, 시작은 분양권이었다」 중에서
시중에 돈이 넘치고 주택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 즉 수요 초과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수요가 증가하면 집값은 오르기 마련인데, 아파트의 매력은 공급이 달릴 때 특히 돋보인다. 실수요가 뒷받침되자 투기꾼들이 부족한 주택을 가지고 농간을 부렸다. 이들은 돈벌이를 위해서 집을 사고팔면서 미등기전매를 통해 손쉽게 시세차익을 챙겼다. 그런데 선분양을 하는 아파트는 미등기전매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전매되는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집값도 뻥튀기되었다. 중간상인을 많이 거칠수록 농산물값이 비싸지는 것과 같다. 값이 비싼 듯 싶어도 수요층이 두텁다 보니 사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뚜렷한 이유 없이 하룻밤 사이에 수십만 원이 오르기도 했다. --- p.122, 「2막3장, 부가세 역풍과 중동특수」 중에서
전금 인상을 둘러싸고 집주인과 마찰이 잦았고, 극성스런 성화에 못 이겨 변두리나 달동네로 내몰려야만 했다. 뛰는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주거의 하향이동이 이뤄졌다. 일부는 고단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수도권 지역으로 ‘피난길’에 오르며 탈(脫) 서울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겪은 최악의 전세대란이었다. 그런데 전셋값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크게 오른 전세가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매매가를 밀어 올렸다. 거북이(전세가)와 토끼(매매가)의 간격이 좁혀지자 “전세금을 올려주느니 차라리 집을 사자”는 매수세력이 형성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요층이 두터워지자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작용, 부르는 값도 점점 높아졌다. --- p.251, 「4막5장, 전세대란에 의한 또 다른 상승」 중에서
이사철 집값 상승은 4년째 되풀이되고 있었다. 오를 만큼 올라 꼭짓점에 도달했다 싶어서 팔고 나면 값이 오르길 벌써 여섯 차례, 아직도 추가 상승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지방도시에서 미분양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아파트값 오름세는 멈출 줄 몰랐다.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신도시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그동안 살던 집을 매물로 내놓기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왔으나, 대부분은 ‘설마’ 했다. 아파트값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번에는 강남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덜 올랐던 강북과 수도권 지역이 큰 폭으로 올랐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단지에 따라 시세가 들쑥날쑥하자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값을 담합하여 멋대로 가격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 p.261, 「4막7장, 믿음이 애써 떠받친 상승장」 중에서
신도시 입주가 코앞에 닥치자 입주 예정자들이 중도금과 잔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물이 쌓여 가면서 수요 체증이 풀린 것이다. 시장 에너지가 강할 경우 공급 확대에 따른 실질적인 아파트값 하락은 분양 시점보다 입주 시점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급히 팔려는 매물이 중개업소마다 수북이 쌓였고 유리창에도 가격 종이가 잔뜩 나붙었다. 시세보다 10% 이상 싼 급매물과 제값을 받으려는 일반매물이 뒤섞여서 호가의 폭이 넓어지며 호가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실제 거래는 가장 싸게 내놓은 매물부터 이뤄지는 법이다. 따라서 급매물이 시세를 주도하는 전형적인 침체기의 모습을 보였다. (…) 복덕방에는 안달복달 형 투자지들의 빨리 팔아달라는 독촉 전화가 이어졌으나, 급매물마저 팔리지 않을 정도로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투자심리가 싸늘하게 식자 집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 p.269, 「4차 파동의 마무리」 중에서
하지만 상승에 취한 사람들은 이러한 경제 상황은 간과한 채 여전히 “가즈아!”를 외치고 있었다. 그로 인한 리스크를 관리하며 보수적으로 투자하는 사람은, 특히 젊은 ‘영끌족’ 중에는 거의 없었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급격히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던 2021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가격은 급격하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 오를 것만 같았던 부동산 시장이 금리 인상이라는 외부 변수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시장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 p.426, 「본격적 하락은 금리로부터 왔다」 중에서
상승하던 시장이 꺾이면 그때까지 넘쳐나던 매수수요는 급격히 위축되는데, 그 속도는 생각보다 매우 빠르다. 2020년과 2021년을 전후해서 규제의 틈새에 있는 주택상품이라며 가격이 크게 올랐던 아파텔, 지식산업센터, 생활형숙박시설, 그리고 공시지가 1억 원 미만 주택…. 이런 물건들의 대부분은 입지나 상품성이 담보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규제의 틈새를 타고 움직였던 반짝 상품일 뿐이다.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이러한 물건의 상당수는 급격한 수요의 위축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제는 팔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p.431, 「파동이 지난 후 알게 되는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