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간접화법으로 써진 『카프카』는 두 철학자와 한 예술가의 만남이 남긴 변형의 기록입니다. 카프카의 문학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철학을 통해 달라졌고, 들뢰즈와 과타리의 철학도 카프카의 문학을 거치면서 달라졌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카프카는 ‘소수문학(littérature mineure)의 작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고, 들뢰즈와 과타리는 리좀·소수성·배치(agencement)와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얻었으니 말입니다.(41~42쪽)
문제가 되는 것은 ‘(굴 없이 살아가는) 전적인, 그러나 헛된 자유’가 아니라, ‘굴과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입니다. 조상이 물려주었거나 자신이 직접 만든 굴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굴을 파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며 새로운 출구를 모색해야 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도주선은 이러한 작업들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죠.(69쪽)
두 저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버지의 법’은 ‘어머니를 향한 욕망’이라는 가상의 죄를 뒤집어씌워 아이에게 죄의식을 불어넣고 복종을 강요하는 수단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법을 통해 아들이 어머니와 결합하는 비극을 막아 준다고 말하지만, 두 저자가 보기에 그는 아들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막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75쪽)
두 저자가 보기에, 문학이 추구해야 할 과제는 문학을 온갖 소수자 되기들로 가득 찬 리좀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문체·장르·문학 운동을 변형하는 가운데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일이고, 이를 통해 문학 전체를 중심 없는 다양성 과 이질성으로 변형하는 일이죠. 두 저자가 보기에 카프카가 흥미로운 작가라면, 그가 자신의 글쓰기를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끌고 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114쪽)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다수문학은 ‘내용에서 표현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소 수문학은 ‘표현에서 내용으로’ 나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다수 문학은 사회적 기준이 허용하는 이른바 ‘표준적인 감수성과 사고방식’에 부합하는 것으로, […] 이미 많은 작가들이 그 제한된 내용에 부합하는 다양한 표현을 발전시켜 두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수문학의 작가는 사회적 기준 내에서 내용을 선택하기만 해도 그에 부합하는 기성의 표현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형적이고 그 표현은 진부한 경우가 많겠지만 말입니다.(117~118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과거의 카프카 해석들이 대부분 부정신학,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선험성(先驗性)이라는 세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신이나 그에 준하는 절대적인 권력자가 어떤 존재인지 결코 알아낼 수 없고(부정신학), 우리를 지배하는 법의 참모습에 끝내 도달할 수 없으며(법의 초월성),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죄로 인해 모종의 죄의식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죄의식의 선험성). 선험이란 ‘경험에 앞선다’는 뜻이죠.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그 자손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저주 받았다고 말할 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욕망하면서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할 때, 기독교와 정신분석학은 죄의식의 선험성을 주장하는 셈입니다.(145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비판’과 ‘도주’를 대립시킵니다. 두 저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비판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고정하고, 고정된 특정한 상태를 규정하며, 그 상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고발하는 일입니다. 그에 반해, 도주는 사회의 지금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고, 사회 자체가 그 출구로 이끌려 나오게 만드는 일입니다.(156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억압’과 ‘욕망’을 대립시키는 한편, 욕망이 억압에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법적 메커니즘의 주된 과제가 법의 이름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 질서에 반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속하는 등 일정한 억압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저자가 보기에 억압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과제, 사법적 메커니즘의 진정한 과제는 욕망을 이러저러한 형태로 빚어내는 데 있습니다. ‘억압하는 자 쪽의 욕망’과 ‘억압받는 자 쪽의 욕망’,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역할들 쪽의 욕망을 말입니다. 사법적 메커니즘은 전자의 욕망을 빚어내어 자신의 부품으로 활용하고, 후자의 욕망을 빚어내어 그 부품들을 가로지르는 재료로 활용합니다. 이렇듯 욕망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여럿이며, 그런 점에서 ‘다의적’입니다.(162쪽)
계열(série)이란 하나의 항(요소, 부품)이 다른 항들과 연결될 때 형성되는 항들의 묶음입니다. 과타리와 함께 저술 작업을 하기 이전부터, 들뢰즈는 계열을 활용해서 작품을 구성하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루이스 캐럴, 제임스 조이스, 비톨트 곰브로비치, 레이몽 루셀 등이 그런 작가들이고, 카프카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작품에서 계열은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173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카프카가 말하는 욕망을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그것이 ‘결여로서의 욕망’, 즉 자신이 결여한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여는 흔히 욕망의 이유와 방향성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요컨대, 우리는 과거에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이죠. […] 그에 반해, 두 저자는 욕망이 ‘충만함·실행·작동’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결여를 메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 는 바를 실행하고 작동시키는 권력입니다.(183~184쪽)
인용문의 후반부에서 카는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는 데 젊은 여성들의 힘을 이용하겠다고 말하는데, 다소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물론 비난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법원이 온통 난봉꾼들로 이루어 져 있다는 그의 발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탁부나 레니와 같은 여성들이 법원의 구성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이유이고, 따라서 그 여성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법원의 난봉꾼들과 유혹적인 젊은 여성들. 그런데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그 일부를 이루는 사법 자체의 작동방식을 가리킵니다.(202쪽)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에서 욕망은 순전히 성적인 것으로, 가족적 재현 속에서 어머니라는 결여와 관련해서 작동합니다. 그에 반해, 분열적 근친상간에서 욕망은 성적인 동시에 사회적·정치적이고, 가족적 재현에 갇혀 있지 않으며, 결여와는 무관하게 항상 자신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카프카』에서도 들뢰즈와 과타리는 양자를 다음과 같이 대립시킵니다.(213쪽)
들뢰즈와 과타리가 ‘의미’와 ‘해석’의 관점이 아니라, ‘실험’과 ‘작동’의 관점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두 저자는 레니라는 인물이 이러저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접속장치로서, 그녀가 자신의 선분을 에로틱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가속화한다고 말할 뿐이죠. 두 저자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그녀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218쪽)
‘독신자의 삶’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의 삶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서 카프카는 독신자가 ‘직업도, 사랑도, 가족도, 연금도 없이’ ‘두 발을 디딜 만큼의 바닥’에 기대에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독신자에게는 머물러야 할 ‘중심’도, 지켜야 할 ‘소유물’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문자 그대로 ‘탈영토화된 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에도 나름의 고통은 존재합니다. 초라함, 두려움, 은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 심지어는 자살 충동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카프카는 독신자의 삶을 ‘배를 타고 파도를 밀어내면서 하는 여행’이 아니라 ‘나무 조각을 타 고 파도에 부딪히면서 하는 여행’에 비유합니다.(223~224쪽)
어쩌면 식물 되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식물 되기가 과연 가능할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한번 떠올려봅시다. 주인공 영혜에게 벌어지는 일들 … 그것은 식물 되기가 야기하 는 강력한 탈영토화의 귀결이 아닐까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아예 거부하면서, 자꾸만 이곳저곳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영혜. […] 영혜의 식물 되기도 그레고르의 벌레 되기처럼 일종의 도주인 것일까요? 그녀의 위태로운 도주는 과연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254~255쪽)
우리는 화부의 항의가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기계들을 규제하는 서로 다른 언표 규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청의 언표가 구사되어야 할 곳에서 헛되이 항의의 언표를 구사했 죠. 그런 이유로 그는 선장, 사환, 경리주임, 책상, 임금지급표, 작업보고서 등으로 이루어진 사무실-기계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268~269쪽)
카프카는 왜 배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요? 들뢰즈와 과타리가 보기에, 이는 그가 경계선 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일하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낡은 관료제가 선진 자본주의의 새 관료제와 뒤섞이고 있음을 체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기술 기계)가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사법적 언표)와 하나로 결합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목격했습니다.(270쪽)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도주하고 사로잡히고 다시 도주하기를 거듭하는 우리 삶의 이러저러한 모습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고」의 섬뜩한 죽음, 「유형지에서」의 잔인한 폭력, 「변신」의 참담한 회귀, 「학술원」의 서글픈 출구, 「굴」의 섬세한 고독, 「요제피네」의 불안한 희망, 세 장편소설의 끝없는 도주 … 카프카가 위대한 작가라면, 그것은 그가 홀로 이 모든 강도를 겪어내고 담아내며 전 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문학 기계였던 것입니다.(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