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갖고 있었다기보다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다. 자랑한 적도 유용한 적도 잊은 적도 없다. 더 이상 갖고 있기 힘든 현실적인 이유들과 싸웠고, 음악이라는 가치 지향적 세계를 지키고자 버텼으며, 그 끝에 언제나 버리지 않는 선택을 했다. (7쪽)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건축에 대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마틴 멀의 말로, ‘음악에 대한 글’의 비판적 시선을 대변하는 소위 명언이다. 명쾌한 말이지만, 다른 매체를 언어화하는 고난을 감안해야 하고, 언어화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예컨대 보통명사 ‘감상’(appreciation)은 18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 용어였다. 다른 매체를 언어화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지적인 인식 역시 제자리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음악에 대한 글을 잘 쓰고 못 쓰고가 아닌, 글이 음악이 되려고 한다는 점이다. (25쪽)
산울림 1, 2, 3집만큼 해외 애호가의 관심을 끄는 한국 음반도 없다. 더 깨끗한 오리지널 프레스를 구하고 모두 해외에 팔면서 알았다. 3집도 디스콕스에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로베니아의 한 친구가 사 갔다.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려 신나 있었는데, 바이닐을 받은 그에게 연락이 왔다. “외관상 이상은 없어. 그런데 불행히도 왜곡된 소리가 나와, 틀림없이 공장에서 발생한 오류 같아. 동영상을 확인해 봐.” 바늘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피치가 높거나 낮아지는 변화무쌍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환불해 줘야 했다. 하지만 내 턴테이블에서 아무 이상 없었던 바이닐을 ‘쿨’하게 그냥 가지라 할 수는 없었다. 슬로베니아에서 보내는 반송 배송료까지 지불했다. (29쪽)
우리의 사랑하는 시간과 이기적인 시간은 서로 달랐다. 세또래 1집을 샀는데, 2집 바이닐이 들어 있었다. 표지는 1집을 좋아하고 음악은 2집을 좋아하지만,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37쪽)
에코는 ‘자메이칸 사운드 시스템’을 운용했다. 음역대별 전용 유닛, 특징적인 ‘스쿱’ 디자인, 수제작을 기본으로 하는 거대한 스피커였다. 압도적인 저음과 음압이 강점이지만 음향 명료도도 뛰어났다. 시작은 이 스피커를 갖고 싶고 레게를 제대로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레게를 기본으로, 역사적으로 ‘자메이칸 사운드 시스템 컬처’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온 현대 댄스음악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조그만 바에서 굳이 ‘댄스음악-노래’를 추구하겠다 선언했다. 그런데 한 달 간 영업하고 알았다. ‘댄스음악-노래’는 부정확했다. ‘함께 듣는 음악’이었다. (49쪽)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2024, 42쪽)에서 “자기 동네의 작은 헌책 기부 도서관에 온통 앨런이 쓴 책과 앨런에 관한 책들로 가득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한다. 모르긴 몰라도 우디 앨런은 알 켈리를 자신에 비교했다면 기함을 토했다. 「애니 홀」(Annie Hall)을 못 보는 것에 비하면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를 못 듣는 건 별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그니션(리믹스)」(Ignition [Remix])를 못 듣는다면? 어, 잠깐만요…. (51쪽)
2009년 동교동 ‘두리반’ 철거 분쟁은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농성 중인 두리반을 거점으로 새로운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하늘에서 떨어졌나 싶은 불연속적 흐름이었다. 그들을 『지큐 코리아』에 기록하고 싶었다. ‘서울의 새 물결’이라는 기획으로 촬영하고 인터뷰했다. 와타나베 도시미의 재즈 믹스테이프 『인터플레이 2』는 그날 챙긴 여러 소품 중 하나로, 가장 아끼고 또 가장 많이 들은 카세트테이프였다. 마그네틱테이프를 잡아 빼서 밴드 404의 온몸에 감았다. 촬영 중 마그네틱테이프가 끊어져 버려야 했지만, 되려 다시 감아 지금까지 보관했다.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비를 쫄딱 맞고, 한강에 입수하고, 새벽까지 촬영을 이어 갔던 그날의, 한 직업인의 전리품이었다. 마치 음악처럼, 거기 저장된 시간이 있었다. 들을 수 있는 것만 음악이 아니었다. (87쪽)
하지만 아직 ‘엔딩’이 아니다. 이 음반이 망가지고 나서야 유튜브로 앨범 전곡을 유심히 들었다. 「케슬러 박사의 바쁜 주말」(Doctor Kessler’s Busy Weekend)은 스카고, 「소피의 전주곡」(Sophie’s Prelude)은 1980년대 일본 신스팝과 공유하는 몽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다시 이 음반을 만나면 살지도 모르겠다. 아직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남았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거칠게 대하면 그것은 천박한 것이 되고 품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초대받은 손님처럼 대한다면 그것은 언제까지나 가치를 잃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귀한 것이 될 것이다.” (89쪽)
턴테이블이 없는 친구들에게도 바이닐을 선물한다. 주로 장식으로 쓸 만한 공간을 가진 친구들이다. 예를 들어 서핑 샵 ‘서프코드’를 운영하는 친구들에게는 우아(UA)의 『프라이빗 서퍼』(Private Surfer) 12인치였다. 천국은 달력에 있으면 멀지만, 바이닐에 있으면 가깝다. 재킷에서는 천국을 만질 수 있고 유추할 수 있다. 밀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천국의 전형성을 현실의 구체성 쪽으로 보낸다. 『서프 브레이크 프롬 자메이카』를 선물하고 싶은,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이 생각났다. (101쪽)
포 세일 폴더에서 가장 오랫동안 안 팔린 음반은 2014년 4월 18일에 등록한 더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의 『애크미 확장판 미국반』이다. 『애크미』에서 비롯한 데모, B면, 리믹스곡이 담겼다. 미국반을 포함해, 유럽반 『애크미 플러스』(Acme Plus), 일본반 『애크미 비공식판』(Ura-Acme), 『애크미 확장판』(Xtra-Acme)으로 다양하게도 우려먹은 음반이다. 대체품이 넘쳐 나서 안 팔린 것도 같고, 정규 앨범 미만 모음집인 탓도 있어 보인다. 내게는 일기장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낙서다. 아무도 못 보는 데이터베이스에 있는데 무슨 낙서냐, 낙서보다 못하다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가치한 음반이라고 그냥 주지 않는다. 나는 음반 파는 사람이다. 되팔지 않고 소장하겠다 약속하면, 내 유령 같은 시간을 건넨다. (111쪽)
불법 음원 거래에 미친 사람들 가운데 좋은 음악 애호가를 여럿 안다. 나는 내 영혼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플라스틱이 좋다.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