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시여, 저를 왜 이따위로 만드셨나요?
당신은 왜 망한 송편처럼 빚은 나까지
다른 예쁜 송편들과 똑같은 세상에 넣고 찐 것입니까?”
대책 없는 미래에 유쾌한 잽을 날리는 정지음표 넉살과 유머
“내가 나를 구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만,
망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거침없는 입담이 펼쳐 보이는 희로애락의 요지경
정지음 작가는 첫 책이자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젊은 ADHD의 슬픔》으로 ADHD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풀어낸 바 있지만, 많은 성인 ADHD 환자들이 그렇듯 ‘징후’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작가는 유년과 청소년기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서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인생을 물어뜯던 “머릿속 개떼”들을 추적한다. “똑똑하다거나 멍청하다거나, 착하다거나 못됐다거나, 온순하다거나 포악하다거나 하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자주 듣던 어린 시절, 공격적인 말투 문제로 부모님이 수시로 학교에 호출당하던 청소년기, 질문이 ‘들리지 않’아 “뭐라고요?”라는 네 글자만 반복하다 쫓겨난 입시 면접까지…… “부정하고 싶은 기억”들이 과거 곳곳에 박혀 있었다. 액면대로면 암울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 속에서 작가는 냉정한 판관과 열정적인 변호사를 오가며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독성을 가진 성장 촉진제”인지 세심하게 분류한다. 매 글 분량은 길지 않지만,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거침없는 입담이 펼쳐 보이는 희로애락의 요지경이 독자 마음에 총천연색 잔상을 남긴다. 이 책 말미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는 “반복되는 실패들이 일상성을 획득”할 정도로 실패에 도가 튼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연말을 앞두고 한 해 동안의 크고 작은 실패들을 돌아보며 최소한 저것들만큼은 온전한 내 것이구나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에는 이상한 안정감이 있다. 성공하면 누구나 그 성공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눈을 부라리거나 시기하고 빼앗으려 들지만 실패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내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실패라면, 역시나 실패를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_ 〈나의 추하고 아름다운 실패들〉
삶이 반전될 희망은 없어도
망한 반죽으로 “나만의 옹기를 빚을 수는 있다”
ADHD 진단을 받은 뒤, 분노, 원망, 자기혐오를 거쳐 작가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잘될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요 모양 요 꼴” 현재이지만, “언젠가 삶이 반전되리란 믿음”을 품고 있던 작가에게 “ADHD 진단은 그런 영광이 영영 도래하지 않으리란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미 X 되어 본 사람들이 멀쩡해진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찾아 읽고, 의식적으로 머릿속을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뇌를 깨우기 위해 약물 치료까지 시작했으나 “모든 방법과 비용이 놀랍도록 소용없었다”. 중학교 시절, 한 친구가 던진 “애들이 다 너 싫어해!”라는 폭탄 발언에 충격받은 일을 되짚으며 작가는 “내가 순식간에 조각나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일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인간관계 자체가 부질없이 반복되는 역동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영원히 좋아하자는 다짐도, 미워하자는 결심도 결국에는 지켜 낼 수가 없었다. 감정의 속성을 깨닫고 난 후론 ‘모두가 너를 싫어한다.’는 말 따위도 우습게 느껴졌다. 어떻게 모두가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쁘디바쁜 현대사회에서 누군가가 나를 영원히 펄펄 끓는 온도로 미워한다면 그건 차라리 사랑이라 봐야 옳았다.”
_ 〈모두가 너를 싫어해〉
작가는 자신의 ‘비정상성’으로 자신만의 삶을 빚어내기로 결심한다. 행복을 “그래프상 최고 높이의 한 지점”으로 생각하는 대신 ‘무념무상’, ‘포만감’, ‘할 일 없음’ 등으로 정의하여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자주 누리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기보다 “나 자신과 우정을 나누는 연습을 시작”하며 “세상에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게 자연스럽다는” 진실을 체득해간다.
”남들을 이기고 싶은 기분에서 이기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승리“
솔직한 자기 대면 끝에 열리는 지평
짐짓 명랑한 문체와 낙관적인 유머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지만, 정지음 작가의 글에는 언제나 무섭도록 솔직한 자기 대면이 깔려 있다. 이는 좋은 에세이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자신의 결함을 투명하게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열리는 지평이 있는데, 정지음 작가는 놀랍게도 매번 그곳에 발을 딛는다. 더불어 독자들은 수치심, 자기혐오, 불행감 등의 감정에서 해방되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작가의 바람처럼 “까닭 없이 미움받는, 반에서 꼴지를 도맡는, 어이없이 사기당한, 미래가 캄캄하기만 한, 소중한 것을 잃어 본, 자꾸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힘들 때마다 얼기설기 위로가 되어 주는 임시방편”들 중 하나가 되어 줄 것이다.
“남들을 이기고 싶은 기분에서 이기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승리야. 행복해지고 싶다면 네 인생의 승부를 너랑만 보는 습관을 들이길 바라. 그래야만 번번이 지는 삶도 즐거울 수 있을 테니까…….”
_ 〈열몇 살 정지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