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삶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안정된 직장, 다정한 연인, 건강한 몸, 어느 정도의 부, 인간관계에서의 인정까지.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갖춘 그림을 상상하며, 그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믿는다. SNS 속 타인의 완벽해 보이는 일상은 내 삶의 구멍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왜 나에겐 이런 삶이 없는가?”라는 의문은 쉽게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실은 간단하다.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가 완벽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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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던 날은 너무 자주, 운이 나빴던 날의 예고편이다. 인생은 정확히 정산된다. 하늘은 공짜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운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그 안에 이미 청구서가 포함되어 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 첨지가 아내의 시체 앞에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날 그의 운이 좋았던 만큼, 세상은 그의 슬픔을 잊지 않았다. 인생 총량의 법칙은 그렇게 잔혹하면서도 정직하게, 종이에 마지막 도장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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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오래가지 않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감정이 정체된다면 삶은 정지한다. 행복이 식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행복은 오래 머물려는 손님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그가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환대할 뿐이다”라는 말처럼, 행복은 붙잡으려 하면 더 빨리 떠난다. 그러나 흘려보내면 다시 돌아온다.
중요한 건 행복이 얼마나 오래갔느냐가 아니라, 행복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삶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인생 총량의 법칙은 말한다. 한쪽 접시가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오듯, 행복이 떠나면 새로운 기쁨이 그 자리를 준비한다.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다음 행복을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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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총량의 곡선을 따라 살아간다. 행복이 정점에 오르면 언젠가 하강이 오고, 고통이 바닥을 치면 언젠가 반등이 온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고통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 방탄복이 된다. 지나간 고통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대신, 당신을 단단히 무장시킨다.
오늘의 상처는 내일의 회복력이고, 오늘의 눈물은 내일의 언어다. 그러니 이제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자. 고통은 당신을 부수기 위해 오는 게 아니다. 당신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오는 것이다.
“상처는 아물지 않아도 괜찮다. 그 자리에 빛이 스민다면.”
-어느 익명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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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의 법칙은 고통을 제거하라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이 균형의 일부임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결국 불행은 새로운 길의 문이 되고, 실패는 다음 성공의 씨앗이 된다. 언젠가 기쁨과 고통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잔을 부딪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결국 나는 내 몫의 총량을 다 살았구나. 그리고 불행은 언제나, 다른 이름의 행복으로 돌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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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일은 인생 총량의 일부일 뿐이다. 한 악기만 크게 울리면 다른 악기는 묻히고, 교향곡은 불균형해진다. 오케스트라가 조화로워야 감동이 완성되듯, 성공 역시 건강·관계·의미와 함께 조율될 때 빛난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처럼 인생 총량의 법칙은 언제나 균형을 요구한다. 성공이란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악기를 조화롭게 울리며 마지막까지 연주하는 교향곡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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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도 실패의 총량이 커다란 기회를 만들어낸 사례는 많다. 쌀 배달 점원으로 일하던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인수 받았으나 일제의 쌀 배급제 시행으로 쌀 유통이 통제되며 첫 사업에서 실패했다.
그 뒤 빚을 내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업을 시작했으나 공장 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다. 화재로 빚더미에 앉은 정주영은 사채업자에게 자금을 빌려 다시 도전했으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모든 차량을 전쟁물자로 압수하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여러 번의 좌절을 지나 건설업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결국 ‘한강의 기적’을 이끈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훗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인생 총량을 이해한 태도였다. 실패가 쌓인 만큼 기회가 예비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거대한 도전에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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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총량의 법칙》은 고통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흔적이 되어 무게로 남고, 그 무게는 사람을 흔들리지 않게 만든다. 스티븐 호킹, 닉 부이치치, 나폴레온 힐, 조엘 오스틴, 롤로 메이-이들의 존재감은 고통을 이고 살아 낸 흔적에서 나왔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가 커지고 있다는 신호다. 아직은 눈에 띄지 않아도, 그 고통은 곧 당신의 눈빛과 말투, 태도 속에 녹아들어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당신을 보고 속으로 말할 것이다.
“저 사람, 뭔가 다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남긴 존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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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균형 위에 서 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고, 지나치게 억제해도 생기가 사라진다. 기쁨이 넘치면 불안이 끼어들고, 슬픔이 깊으면 삶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성공에 취한 자는 오만으로 무너지고, 실패에 잠긴 자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다.
결국 인생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힘, 즉 균형의 철학이다. 동양의 중용과 서양의 황금률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졌지만, 그 뿌리에는 동일한 통찰이 흐른다.
“모든 것은 총량의 조화 속에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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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사람은 현재의 고통을 단순한 현재형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과거형의 청구서로 읽는다. 이 관점은 고통을 단순한 감정의 늪이 아니라 구조적 사건으로 이해하게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 고통을 음악의 실험 토양으로 삼았고, 미야모토 무사시는 고독을 지혜로 전환했으며, 역사 속 왕조들은 사치의 총량을 혁명의 피로 갚았다. 총량의 법칙은 단호하다. 과거의 누적은 반드시 지금의 청구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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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집착’이라 한다. 이 집착은 감정을 통제하려는 마음, 즉 억누르려는 욕망이다. 《법구경》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다.”
이 말은 곧 ‘스트레스 해소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감정을 억누르면 그것은 내면의 독으로 남지만,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흐름 속에서 사라진다. 명상이나 호흡 훈련이 스트레스 치료에 효과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억제 대신 관찰의 태도를 취할 때, 감정의 총량은 균형을 찾는다. 복수는 그때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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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는 회복 탄력성을 가장 위협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스마트폰 알림, 무한 스트리밍, SNS의 ‘좋아요’는 뇌의 보상회로를 쉬지 않고 자극한다. 작은 쾌감이 매일 반복되며, 마치 매일 샴페인을 마시는 것처럼 뇌는 금세 지친다. 거기에 음주, 과식, 성적 자극까지 겹치면, 30대 중반에 이미 60대의 감정 피로를 느끼게 된다. 티모시 페리스의 《멘토의 부족》이라는 책에서 한 멘토가 말했 듯, “우리는 몸보다 뇌를 더 혹사시키며 살고 있다.” 고통을 관리하지 못하면 쾌락은 너무 일찍 고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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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은 단순히 수입의 단절이 아니라 정체성의 붕괴다. 아침마다 출근하던 길이 사라지고, 명함이 사라진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낀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듯, “군자는 기구가 아니다.” 즉, 한 직장에 매여 있는 기능적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직장을 잃은 순간, 대부분은 자신을 ‘버려진 기구’로 느낀다. 이때 실직은 불운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생 총량의 법칙은 이 불운을 새로운 균형점으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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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실패는 단순히 돈을 잃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총량을 다시 배열하는 강력한 계기다. 손익계산서에선 적자지만, 삶의 총량표에서는 새로운 자산이 기록된다. 돈 대신 시간을, 명예 대신 진실성을, 권력 대신 관계를 얻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왕이 모든 권력을 잃고 미치광이가 된 뒤에야 진짜 인간성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패는 파괴가 아니라 재편의 시작이다.
그러니 경제적 실패 앞에서 자신을 ‘끝난 사람’이라 단정 짓지 말라. 지금 무너진 자리는 다른 총량이 채워질 준비를 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돈을 잃는 대신 사람을 얻고, 직업을 잃는 대신 자신을 되찾는 순간, 경제적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 성공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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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통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구조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무게다. 그 무게 덕분에 인간은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으며, 부서져도 강해질 수 있다. 그의 문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고통을 감추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당신을 떠받치고 있는가?”
빙산 아래의 고통은 언제나 성공의 연료다. 그것이 바로 인생 총량의 법칙이 헤밍웨이 문학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이 문장은 고통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는 실제로 수많은 전쟁과 사고, 실연, 부상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빙산 아래에 숨겼다. 그가 말한 ‘빙산 이론’은 바로 이것이다. 보이는 문장은 1/8에 불과하고, 나머지 7/8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심연에 있다. 그 고통이 작품의 밀도를 만들었다. 고통을 회피한 작가는 깊이가 없고, 고통을 견딘 작가는 세상 전체를 쓸 수 있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 절제는 바로 상처의 반대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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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의 폭발이자 소멸이며, 동시에 균형을 향해 끊임없이 진동하는 진자 운동이다. 한쪽으로 기울면 반드시 반대쪽으로도 흔들린다. 감정의 총량 이론을 사랑이라는 드라마에 적용해 보면, 우리는 왜 사랑 앞에서 웃고 울며, 미치도록 기뻤다가 절망에 빠지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절대적인 기쁨이나 절대적인 고통으로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정반대의 감정을 예비하고 있고, 그 감정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려는 경향을 띤다.
《인생 총량의 법칙》에서 말하듯, 사랑에서의 균형은 인생의 다른 균형과도 맞닿아 있다. 지나친 의존은 자아를 지우고, 지나친 자립은 타인을 밀어낸다. 이상적인 사랑은 자신을 해치지 않으며 타인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사랑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진자의 진동을 이해하고 감당하는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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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은 순환한다. 웃음을 미룬다고 해서 내일의 고통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웃지 않은 기쁨은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니 기쁨은 아끼지 말고, 오히려 과감히 누려야 한다. 앤드류 로스소킨의 말처럼, 세상은 결코 보이는 만큼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지금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총량의 일부다. 그리고 언젠가 그 웃 음은 다시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이제 결론은 단순하다.
“괜찮아, 이건 총량의 일부야. 기뻐할 자격이 있어.”
그리고 그렇게 웃는 순간, 인생은 다시 순환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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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고통에 몰두하기 쉽다. 내 삶이 무너지고 있을 때, 타인의 불행은 사소하게 느껴지거나 때로는 귀찮게 다가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의 아픔에 다가가 연대할수록 내 고통의 총량이 줄어든다. 뇌과학적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공감과 연대의 순간,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은 낮아지고 안정감을 주는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즉,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순간, 나의 신경계도 함께 치유된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타인을 돕는 것은 단지 선행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지만, 인간은 혼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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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의 법칙에 따르면, 고통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다른 형태로 환원된다. 어떤 이는 실패를 통해 새로운 인간 관계를 얻고, 또 어떤 이는 질병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발견한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고통은 무의미한 짐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으로의 길목, 의미로의 전환점이다. 삶은 이렇듯 늘 회계장부를 쓰고 있다. 이제 질문해보자.
“내가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어떤 기쁨으로 보상되었는가?”
그 대답은 각자 다르겠지만, 공통된 진실은 있다. 인생의 장부는 공평하지 않을 수 있어도, 균형을 지향한다는 것. 당신이 견뎌낸 그날의 무게는, 이미 내일의 가벼움으로 보상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니 기억하라. 고통은 단순한 마이너스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기쁨의 전주곡이다. 당신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언젠가 가장 큰 기쁨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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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당신은 무엇에 총량을 썼는가? 짜증 섞인 대화에 낭비했는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 투자했는가? 그것을 쓰고 난 뒤, 당신은 더 가벼워졌는가, 아니면 더 지쳐버렸는가? 삶은 결국 총량의 정산표이자 누적 기록이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균형을 만든다. 총량을 의식하는 사람은 더 이상 남의 인생을 흉내내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이건 내 총량을 쓸 가치가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삶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오직 나만의 총량표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