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파리, 1930년대 경성, 1960년대 말의 지방 소도시.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지만, 내 마음속에는 신기하게도 이 세 공간이 나란히 놓여 있다. 19세기 말 파리는 발터 베냐민이 깊은 사유에 잠긴 채 천천히 거닐던 때의 원형이 만들어지던 도시다. 1930년대 경성은 소설가 박태원이 ‘구보’라는 이름으로 길 위를 헤매며 시대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공간이다. 그리고 1960년대 말의 그 소도시는, 어린 내가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세상을 처음 바라보게 해주었던 곳이다.
겉보기에는 모두 다르지만, 이 세 시대의 도시들은 자본주의(곧 근대)가 막 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를 공유한다. 농촌 중심의 공동체는 무너지고, 사회는 갈수록 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으며,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돈과 상품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리는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꽃핀 중심부였고, 경성은 식민지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근대화된 변방이었다. 1960년대의 한국 소도시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서서히 진행되던 곳이었다.
#26-27쪽_일곱 살의 산책자, 근대를 만나다
공부 잘해서 서울법대 가고, 서울법대 가서 고시 합격하고, 그런 다음에는 판검사나 국회의원이 되고, 그래서 결국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사는 게 가장 큰 성공이라고 배운 사람들이 많다. 꼭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그 비슷하게라도 되는 것이, 그마저도 안 되면 혈연·지연·학연을 동원해 그런 지인을 알고 지내는 것이 작은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무작정 추종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그 동조 세력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문화강국이 되었다고 자부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가 빚어낸 왜곡된 성공 신화가 놓여 있다. 서울법대를 정점으로 한 학벌주의와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을 길러냈지만, 그들이 결국 실패한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학교가 만든 성공 신화가 실패의 굴레가 된 것은 아닐까?
#55-56쪽_학교가 만든 성공신화의 그늘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어느 날, 나의 뒷배였던 급장이 숙제 검사를 하던 그 교실로 돌아가 보자.
나는 급장의 최측근으로서 모든 급우에게 적용되어야 할 숙제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었던 것인데, 그때 내가 잠시나마 누렸던 것이 바로 소수의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권리, 곧 특권이었다. 내가 그날 그 교실에서 배운 것은 특권을 추구하기보다 그
것 없는 삶을 택하는 편이 훨씬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특권을 누리려고도, 그 누구에게 특권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는 특권의 쓰디쓴 결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특권 없는 삶이 훨씬 더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1쪽_달콤쌉싸름한 특권의 맛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골목과 공터는 대기업이 지은 브랜드 아파트에 파묻혀 버렸다. 어머니가 두부나 간장을 사러 가서 한참 수다를 떨다 오던 구멍가게가 있던 곳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나 똑같이 생긴 편의점의 알바생이 무심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라디오나 전축이 고장 나서 달려가면 언제든지 감쪽같이 고쳐주던 동네 전파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 과연 골목과 구멍가게와 전파상이 없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아파트, 더 많은 소비, 더 높은 수출액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다. GDP는 여전히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발전과 행복은 GDP의 숫자로는 결코 측정될 수 없다.
#137쪽_GDP라는 숫자의 마법에서 풀려나기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이전까지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우리’를 전복하는 단어 하나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천만번을 변해도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 벽두 어느 패션광고에 등장한 이 말은 ‘나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으로 들렸다. ‘나’들은 너와 같을 수도 없거니와 우리라는 집단 속에 포함될 까닭도 없다고 말했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로 여겨질 조그만 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높고 단단한 성역이었다.
#175쪽_‘우리’와 ‘나’는 만날 수 있을까?
가난한 농경인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민으로 신분을 상승하려는 소녀들의 욕망, 그리고 다시 신분 사회의 위계를 재현해 귀족(양반)의 지위를 누리려는 도시 중산층 여성들의 욕망. 전자는 자본주의적 욕망이었으나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었고, 후자는 봉건적 잔재에 머무른 시대착오적 환상이었다. 식모라는 직업 혹은 제도는 이 두 왜곡된 욕망이 절묘하게 만나 탄생한 약 30년간의 기형적 현상이었다. 여기에는 산업화(자본주의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대한민국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식모라는 직업 혹은 제도는 그 삐뚤어진 두 개의 욕망이 각각 다른 배출구를 찾게 되면서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204쪽_식모 그리고 두 개의 일그러진 욕망
담배는 ‘의미’였다. 단순한 상품이나 기호품을 넘어 시대와 문화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는 뜻이다. 담배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이기도 했고, 사유와 여유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때로는 교류와 소통의 매개체가 되었고, 때로는 고독과 번민의 벗으로 함께 했다. 애연가들은 각자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의미를 누리며 담배를 즐겼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담배는 질병, 퇴폐, 미개, 불량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소비되기 시작했다. 이제 담배는 오로지 반문명적 상징으로만 남았다. 이를 ‘담배 의미의 일극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담배의 부정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결국 나도 담배를 끊었다. 열아홉 살 재수생 시절에 배운 이후 사십여 년 간 희로애락의 순간을 함께했던 담배를 미련 없이 떠나보냈다. 지난 세월에 두어 번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한 금연을 이번만큼은 성공시킬 수 있을 듯하다.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다. ‘담배 의미의 일극체제’에 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252쪽_담배의 의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앞에서 헌책을 처분하는 네 가지 조건으로 문화적 의미의 보존·공익성·편의성·환금성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 가운데 확실하게 지켜진 것은 편의성 하나뿐인 셈이다. 어쩌면 다음 처분 시점이 오면 그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모든 것은 저속한 것이 된다.” 약 150년 전 카를 마르크스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곱씹어 본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처분 방식을 못 찾아 전전하던 내 80여 권 책들은 우여곡절 끝에 내 품을 무사히 빠져나갔다. 잘 가라, 한때 나의 열정을 받아주던 벗들이여. 좋은 임자를 만나 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하기를.
#260쪽_나의 헌책 처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