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윤봉길’, ‘이봉창’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익숙하다.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TV를 통해 익숙하게 알게 된 유명 연예인의 이름처럼 말이다. 하지만 ‘강우규’라는 이름은 어떠한가? 비인기 연예인을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마주쳤을 때에 느끼는 애매함처럼 대부분은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낯설음을 느낀다. 이는 참으로 안타깝고 아이러니한 일이다. 강우규는 어찌 보면 위의 인물들을 우리가 지금까지도 익숙하게, 또는 영웅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1919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향한 강우규의 의거는 이러한 의거가 탄생되는데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강우규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서, 이를 시작으로 이들의 의거를 비롯한 많은 의거로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3·1운동 이후의 크고 작은 의거들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강우규 의거는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역(남대문역)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을 시작으로 타오른 국내외의 뜨거웠던 만세운동에도 일제는 끝까지 조선 통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만주·러시아 등지의 일부 한인들은 일제를 우리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세운 계획 중에는 조선총독을 저격함으로써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일본과 세계만방에 전달하자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계획의 실천자가 바로 한의사 강우규였다. 강우규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기 위해 과감히 폭탄을 투척하였다. 강우규가 던진 폭탄은 안타깝게도 목표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는 닿지 못하였지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신임 총독을 환영 나온 일제 관헌과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성과를 냈다.
강우규 의거는 단순히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당시 그의 나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가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한 당시 나이는 65세.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윤 봉길·이봉창의 의거 나이가 각각 20·24세·32세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우규의 의거는 노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점에서도 상당히 흥미롭고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는 강우규 의거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그는 의거 이후의 재판과정과 수형생활·처형과정에서도 일제 앞에 끝까지 당당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강우규 의거는 이와 같이 우리 민족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학계에서는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그 결과 그의 의거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구체적인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의사 강우규라는 인물과 그의 항일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이 제대로 조명되고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강우규라는 인물과 그의 의거를 다각도로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그의 의거를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학계 나아가 일반에도 그의 이름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함이 이 책을 쓰는 작은 목적이다.
구체적으로는 강우규의 민족의식 형성, 민족운동의 전개·사상, 그의 의거와 순국이 끼친 영향, 그의 활동이 한국민족운동사 상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특히 사상 면에서 필자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 기독교 사상과 동양평화론이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학계와 일반에서는 이 점을 간과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한의사 강우규는 단순한 활동가가 아니라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시대인식을 가지고 활동에 임했던 인물임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강우규는 필자 개인적으로도 큰 애정과 존경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는 비단 그의 의거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적인 면모와 사회적인 측면에서 강우규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바가 참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동물이다. 말로는 죽음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더욱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때문에 젊은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노인이 자신의 목숨을 나라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당시 나이 65세로서 의학이 발달한 지금은 60대가 젊은 노인축에 속하지만, 60대는 이미 평균 수명을 넘긴 나이로 생물학적으로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나이였다. 그는 바로 이런 인간적인 두려움을 초월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조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한편으로 현재 강우규가 일반에 낯선 이름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강우규는 그 역사적 위상에 비해 후대에 크게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안타까운 우리 사회의 일면 탓이 크다. 역사적으로 큰 공헌을 한 인물의 현 위치는 그 후손들의 유무와 그들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더욱 견고해지기도 하고 혹은 약해지기도 한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강우규의 경우가 그러한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 사회가 가진 ‘성공’만을 인정하는 면이 강우규의 의거를 더욱 잊혀지게 만든 요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강우규 의거는 총독 암살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잣대로는 실패한 의거이다. 그러나 총독을 직접 암살하진 못하였어도 그의 의거가 일으킨 파장은 성공한 의거 못지않게 대단한 역사적 현실이다. 그럼에도 성공만을, 1등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잣대가 강우규라는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지워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몇 가지 점들만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강우규라는 낯선 노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이후에는 독자들의 머릿속에 우리가 기억하는 ‘윤봉길·이봉창’ 앞에 우리가 잊고 있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그 이름, ‘강우규’가 떠올려지길 기대한다.
올해는 광복 80주년, 강우규 탄생 1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잊혀진 전설이 되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에 그동안 절판되었던 졸저 『강우규의사평전』(선인, 2010)을 수정·보완해 보았다. 이 책의 간행을 통하여 강우규 의사의 진면모가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주는 조그마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25년 11월 문화당에서
청헌 박환
2025년 11월 문화당에서
청헌 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