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최행귀 외
최행귀, 이인로, 임춘, 이규보, 최자, 이제현, 서거정, 김시습, 성현, 차천로, 유몽인, 이수광, 신흠, 허균, 김만중, 김창협, 김창흡, 김춘택, 이익, 홍양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남공철, 정약용, 조수삼, 김려, 홍석주, 김정희, 이상적 | 글
최행귀는 나고 자란 연대는 알지 못한다. 고려 초 광종 때 사람으로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림학사 내의승지 벼슬을 했다. 균여대사가 쓴 향가 ‘보현십원가’ 11수를 한문으로 옮기고 서문을 썼는데, ‘향찰’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이인로(1152~1220)는 고려 문벌 귀족 출신이지만 일찍 부모를 잃고, 승려가 그를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19세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몸을 피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이름을 떨쳤다. 막힘 없이 글을 잘 지어 뱃속에 원고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복고’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파한집》이 전한다.
임춘은 고려 의종 때 태어나서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가 출신으로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무신의 난에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 남았다. 벼슬길에 오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가전체소설 ‘국순전’, ‘공방전’을 썼다. 문집 《서하집》이 전한다.
이규보(1168~1241)는 호탕하고 생기 있는 시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문장가. 호는 백운거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문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체험을 진솔하게 담은 시를 써 새로운 문학의 길을 열었다. 《동국이상국집》이 전한다.
최자(1188~1260)는 고려 무신정권 때 뛰어난 행정가. 이규보의 추천으로 최씨 정권에서 벼슬을 시작했고, 정권이 무너진 어지러운 시국에 수상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문학 비평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보한집》이 전한다.
이제현(1287~1367)은 고려 후기 문인. 공민왕을 도와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삼십 년에 걸 쳐 다섯 차례나 중국에 다녀오면서 많은 시를 썼다. 백성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수집하여 ‘처용가’, ‘사리화’ 같은 작품을 남겼다. 《익재난고》와 《역옹패설》이 전한다.
서거정(1420~1488)은 조선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활동한 학자이자 벼슬아치.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쓴 《동국여지승람》, 우리 한문학의 독자성 을 내세우며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다. 《동인시화》, 《필원잡기》가 전한다.
김시습(1435~1493)은 다섯 살 때 세종에게 불려가 시를 쓸 정도로 총명했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의롭지 못한 세상에 절망하고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을 접었다.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로 방방곡곡을 누비며 방랑하다 경주 금오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 《매월당집》이 전한다.
성현(1439~1504)은 조선 성종 때 학자이자 시인. 호는 용재. 당대 거문고 명수 이마지에게 배워서 음악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그때까지의 음악을 집대성하고 구전 가요들을 모아 《악학궤범》을 펴냈으며, 민간에 전하는 옛이야기와 속담을 모아 《용재총화》를 냈다. 시와 글은 《허당백집》에 전한다.
차천로(1556~1615)는 서경덕의 제자였던 아버지 차식과 아우 차운로와 함께 ‘삼소’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외교 문서를 맡아 쓰는 제술관으로 활동했으며, 시가 뛰어나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글가사 ‘강촌별곡’을 썼으며 《오산집》이 전한다.
유몽인(1559~1623)은 선조와 광해군 때 두루 벼슬을 했으며, 명나라와 외교를 맡는 등 공이 컸다. 인조반정 때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광해군 복위 음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조선 중기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치고 글씨도 전서, 예서, 해서, 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야담을 모은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전한다.
이수광(1563~1628)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으로 어지러웠던 사회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의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하였다. 조선 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이동하는 가운데 실학파의 선구자 노릇을 한 사람이다. 백과사전이라 할 《지봉유설》을 편찬했고, 《지봉집》이 전한다.
신흠(1566~1628)은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신립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장유, 이식, 이정귀와 함께 고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문장이 뛰어나 외교 문서와 의례 작성에 참여했다. 한시를 많이 썼고 시조도 여러 편 남겼는데 농민들의 소박한 생활을 즐겨 노래했다.《상촌집》과 《야언》이 전한다.
허균(1569~1618)은 조선 중기 문신, 학자. 학식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나, 이단을 좋아하여 도덕을 어지럽힌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학문이나 정치를 보는 관점에서 서자를 비롯한 하층민을 대변했다. 광해군 때 역적모의를 했다 하여 참형되었다. 한글 소설 《홍길동전》 을 썼고, 《국조시산》, 《성소부부고》가 전한다.
김만중(1637~1692)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대사헌과 대제학을 지냈다. 인현왕후의 일로 남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김만중은 우리 글로 쓴 문학을 높이 평가했고, 한글로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다.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썼으며, 《서포만필》이 전한다.
김창협(1651~1708)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죽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의 명을 받아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할 정도로 인정받는 학자였으며, 이이와 이황의 학문을 절충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문집 《농암집》이 전한다.
김창흡(1653~1722)은 김창협의 아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겨 노래하고 시문을 평론하는 데 뛰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형 김창협과 같이 영평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기》를 좋아하고 한때 불경도 연구했지만,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가 왕위에 올라 벼슬을 주었지만 끝내 사양했다. 《삼연집》이 전한다.
김춘택(1670~1717)은 김만중의 종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론의 중심 가문이라 언제나 정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여러 차례 유배되었다. 시재가 뛰어나고 문장이 훌륭하다는 평을 들었다. 문집 《북헌집》이 전한다.
이익(1681~1763)은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학자로 지냈다. 실학파의 대가로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문학, 언어, 풍속 들을 깊이 연구하고 천문, 지리, 생물학, 수학, 의학 같은 자연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성호사설》이 전한다.
홍양호(1724~1802)는 영조 때 학자이자 문신. 문장과 글씨 모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흥 부사 시절에 《북새풍토기》를 썼고,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해동명장전》을 썼다. 《이계집》을 비롯 책을 많이 남겼다.
홍대용(1731~1783)은 북학파 실학자로 박지원과 친분이 깊었다. 우리 겨레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사회 계급과 신분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 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헌서》, 《의산문답》들이 전한다.
박지원(1737~1805)은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 따위에 두루 학식이 깊어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소설 십여 편, 시 사십여 수, 여러 문학론과 사회개혁 사상, 편지글이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담겨 있다.
이덕무(1741~1793)는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시문학에 이름이 높았다. 자는 무관, 호는 청장관, 형암, 영처. 박지원에게 배웠으며,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4가로 불린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서적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청장관전서》가 전한다.
박제가(1750~1805)는 북학파의 한 사람. 서자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박지원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4가로 불린다. 정조에게 등용되어 규장각 검서관 일을 맡아보았다.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북학의》는 경세가로서 조선 의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개혁 방안을 다룬 중요한 책이다.
남공철(1760~1840)은 정조, 순조 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고, 학문 연구에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고문의 법도를 준수하는 창작론을 표방했다. 《금릉집》, 《귀은당집》이 전한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학 경전에 밝았고 시도 잘 썼으며, 과학 기술에도 뛰어나 수원성 설계를 맡았다.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해 18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며, 정치, 사회, 문학, 역사, 과학 따위 여러 방면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여유당전서》가 전한다.
조수삼(1762~1849)은 중인 신분으로 여든세 살에야 과거에 합격했다. 여섯 차례나 중국을 여행하여 청나라의 명사들과 교유했고 중국에까지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젊어서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나 자연을 소재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사회 현실을 묘사한 시를 많이 썼다. 저잣거리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에 대해 쓴 연작시들이 《추재집》에 전한다.
김려(1766~1822)는 시인, 산문가이자 역사학자. 정치적으로 노론 시파 계열에 속하였으나 억압과 피해를 당한 사대부로 평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정통 고문에서 벗어나 ‘패사소품체’로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썼다. 함경도 부령과 경상도 진해에서 십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담정유고》가 전한다.
홍석주(1774~1842)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성리학 세계관을 지킨 정치관과 학문관을 유지했다. 시와 산문을 잘 지어 시대를 대표하는 고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아우 홍길주, 홍현주가 모두 뛰어난 문인이다. 《학강산필》이 전한다.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추사, 완당. 시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예술가로 이름을 떨쳤다. 박제가의 제자로 북학파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며 고증학 가운데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추사체’라는 글씨체를 완성했으며, 한문만이 아니라 우리 글로도 편지를 많이 남겼다. 《완당척독》, 《완당선생전집》이 전한다.
이상적(1804~1865)은 중인 신분이었으나 순조, 헌종의 관심을 받아 지중추부사와 온양 군수 같은 벼슬을 했다. 역관으로 열두 번이나 중국을 오가며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사귀었다. 신위, 김정희 들에게 배우고 영향을 받았으며 시를 비롯하여 서화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문집 《은송당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