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먼 다큐멘터리 같은 동화]
변두리 시장 끝자락, 낡은 가게들 틈으로 이발소가 보인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
도 툭 떨어질 것만 같은 빛바랜 간판,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삼색등이 50년 세월을 머금고 있다. 이곳은 동구 할아버지의 인생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동구네 삼대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동구네 이발소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던 건 이발소가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게가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그 특별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평범하고 소박한 어린이의 일상과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와, 저런 사람도 있네?’ 하면서 잠깐 눈길이 갔다가 나도 모르게 집중해서 보고 있는, 삶의 진정성에 끌려드는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동구는 행복한 어린이인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복작복작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과 등교를 준비하는 가족들, 집과 연결된 할아버지의 일터가 있고, 함께 학교 가자고 부르는 친구가 있어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후닥닥 몸을 일으킨다. 오늘 동구의 하루는 어떨까 자못 기대된다. 그중 특별함을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면 동네 할아버지들과 얽히는 시간일 것이다. 동구는 이발사인 할아버지와의 유대가 돈독하다. 내 할아버지라 좋고, 자기가 할아버지를 닮은 것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의 친구인 동네 어르신들의 일상도 동구의 삶에 스며 있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참새방앗간인 동구 이발소에 비상등이 켜졌다. 할아버지가 다친 것도 속이 상하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배신을 하다니! 동구의 마음이 쓰릴 수밖에. 소중한 저금통을 털어 할아버지를 위한 복수 작전에 돌입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웃 시장 상인들의 마음이 켜켜이 모여 잠시 멈춰 있는 동구 이발소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동구에게 할아버지의 이발소가 놀이터이자 배움터인 것처럼 동구네 이발소는 모두의 이발소이다. 이곳을 즐겁게 오가는 사람들이 있고, 모두의 시간이 이곳에서 함께 흐르고 있다. 삼색등이 뱅글뱅글 돌아가듯 복작복작, 이곳에서의 소중한 시간이 멈추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 ]
시대가 변했다. 계속해서 빠르게 변해 간다. 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는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발전한다. 머리를 다듬는 일만 해도 그렇다. 고객의 시간을 아껴 주고,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용실이 넘쳐 나는 세상에 50년 전통의 이발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세상에 옛 방식 그대로의 이발소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용객이 적다고 해서 서비스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게는 낡고 운영 방식은 경쟁력을 잃어 갈지 몰라도 솜씨 하나만은 뒤처지지 않는 자부심이 있는 곳. 동구 이발소가 그런 곳이었다. 투박하면서도 정교한 할아버지 이발사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객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기꺼이 쓸 수 있게 만들었으니 5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테다. 우리가 백년가게를 찾아다니고 장인 정신을 높이 사는 까닭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자신만의 무언가를 꾸준히 지켜 내는 힘 때문이다. 동구 할아버지의 그 힘은 좁게 보면 머리카락에 밀가루를 발라 정교하게 다듬는 솜씨,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늘 문을 여는 성실함 같은 것이겠지만, 넓게 보면 ‘무엇이든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마음’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몸소 실천하며 손자에게 알려 준 그 마음이 언제까지, 어떻게 이어질까 기대가 된다. 할아버지의 가위질 솜씨를 닮은 동구가, 할아버지를 닮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어 갈 ‘동구 이발소’는 어떤 모습일까? 변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것,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 멈추고 싶지 않은 이어달리기 ]
동구의 매콤한 복수가 다소 아쉽게(?) 끝난 뒤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가 기운을 차리고 이발소 문을 다시 열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한 청년이 이발소 안으로 들어섰다. 청년이 돈 없는 취업 준비생이던 시절, 동구 할아버지가 나누어 준 따스한 마음에 보답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발비도 받지 않고 머리를 잘라 주고, 가끔 용돈까지 손에 쥐어 주었다니 이런 어른을 요즘 주변에서 볼 수 있나 싶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던 청년이 이발소 문을 다시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했을 마음, 할아버지 이발사에게 드릴 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던 순간, 이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동구의 시선 등 모든 것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어달리기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길 때의 간절함을. 절대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온 마음을 모으는 건 팀의 승리를 향한 염원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변두리 시장 골목의 작은 이발소, 나의 학급, 우리 집, 우리 동네…… 모든 곳에서 이어달리기는 계속될 수 있다. 동구네 이발소의 삼색등도 멈추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