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사라진 집처럼 기억도 지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는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_p.6
그토록 죽고 싶어 하더니 결국 내가 죽어봤구나. 그래, 어제까지의 나는 죽은 거야.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 거야. 위세척을 하며 속을 비워낸 것처럼 지난 시간도 모두 씻어낸 듯한 개운한 기분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_p.20
자리를 피할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벌벌 떨기만 했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었다. 울지는 않았다. 우는 건 아버지의 화를 더 돋우는 일이니까. _p.36
열 살 아이는 놀라고 무서웠던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슴 깊이 넣어둔다. 그리고 엄마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잘못을 빈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릴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빌고 또 빈다. _p.56
‘하느님, 저에게 왜 이런 아버지를 주셨나요. 저는 아버지가 필요 없어요. 데려가주세요.’ _p.86
며칠 전부터 죽음을 계획한 것도,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쳐 있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죽어야겠다는 결심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유서를 쓰면서 무섭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_p.127
“수경 님은 누구보다도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수경 님에게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약입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잘 살아요.” _p.152
아이 덕분에 마음이 자란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아이를 키운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건강히 키워준 거였다. 어쩌면 아이는 어른의 자라지 못한 마음을 키우기 위해 한 시절 우리 곁에 머물러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_p.160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의 엄마가 되어, 넘칠 만큼의 사랑을 주고 싶었다. 모진 세상에 던져진 엄마를 지켜내고 싶었다. 배곯지 않게 충분히 먹이고, 길에서 주워 온 옷이 아닌 깨끗한 원피스를 입히고, 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 몸에 상처 내는 남자는 얼씬도 못 하게 떼어놓고, 온 마음 다해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게 하고 싶었다. _p.179
흔들리는 전철 안. 사람들로 촘촘히 채워진 좁은 공간에서 치이고 부대꼈지만, 형준이 손을 잡아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설 수 있었다. _p.192
아버지를 머리로만 용서했을 뿐 여전히 내 안에서는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또 아버지에게 미워하는 눈빛을 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애써 좋은 기억을 찾을 필요도, 용서를 한다 안 한다 같은 이분법적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다. _p.218
평생 끌어안고 살 줄 알았던 기억, 아픔, 상처 그리고 미움, 분노, 억울함 같은 것들은 모른 척하면 할수록 더욱 강한 힘을 내었다. 나는 그것들이 나를 공격하며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서 어떻게든 나에게서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_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