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산하를 떠돌며 기록하다
1455년 계유정난으로 세상이 뒤집히던 순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겼다는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불사른다. “이 세상에서 도가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과거와 관직의 길을 버리고 방랑을 택한다. 그의 발걸음은 철원 복계산에서 시작해 한양, 관서, 관동, 충청으로 이어지며, 그 여정은 수많은 시와 기록으로 남았다. 『김시습의 조선 유람기』는 이 흩어진 기록들을 따라가며, 조선의 산천과 사찰, 마을과 강을 배경으로 그의 심경과 사유를 복원한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는 관서 지방을 유람한다. ‘호탕한 유람’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것은 고통과 번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길이었다. 이어 1459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금강산으로 향한 여정에서는 포천–신철원–김화–창도–단발령–내금강에 이르는 상세한 동선이 펼쳐진다. 금강산을 둘러싼 조선 문인들의 동경과 유람 문화,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탄생한 시편들이 이 책에서 생동감을 얻는다.
서울·경기 일대의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수락산 정상의 ‘매월정’에서 내려다본 서울, 노원의 갈대벌판을 묘사한 「노원의 풀빛」, 삼각산의 안개, 도봉산의 봉우리 등은 한시와 함께 소개되며 당대의 풍광을 그대로 전한다. 감악산·회암사·마니산·백운산 등 여러 산과 사찰은 그가 정처 없음 속에서도 마음을 씻고 길을 찾으려 했던 자리로 등장한다. 충청 지역에서는 강경포구를 거쳐 은진 관촉사 대불을 알현한 기록이 이어지며, 웅대한 자연과 신앙적 감응이 담긴 시문들이 함께 실린다.
이 책은 김시습이 걸었던 실제 여정과, 그 길 위에서 써 내려간 시문을 함께 묶어 ‘조선의 기행문학’을 새롭게 읽게 한다. 자연의 세밀한 묘사, 사찰과 누정의 문화, 지역과 시대를 품은 이야기 속에서, 한 인간이 혼란의 시대를 견디기 위해 떠난 사유의 발걸음이 지금 다시 살아난다. 『김시습의 조선 유람기』는 방랑이라는 삶의 선택이 어떻게 한 시대의 정신과 문학을 만들어냈는지 조명하며, 오늘의 독자에게도 흔들리는 시대를 건너는 힘과 통찰을 건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