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속으로
〈책 보는 할머니〉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이야기의 신’이라고 적혀 있는데, 인쇄된 글이 아니라 굵은 펜으로 직접 쓴 제목이었다. 책장을 넘겨 보았다.
“이건 책이 아니라 노트네요?”
“노트라고 할 수도 있고, 책이라고 할 수도 있지.”
좀 이상한 대답이었다. 할머니는 그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 어디를 그렇게 보고 계시는 거예요?”
“세상을 보고 있지. 세상을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여기 앉아 있으면 이야기가 쏟아져 내리거든. 비가 오는 것처럼 말이야.”
할머니가 또 이상한 말을 했다.
“이야기가 쏟아져 내린다고요? 어떤 이야기요?”
“세상의 모든 이야기. 지금도 쏟아져 내리고 있잖아. 너도 가만히 느껴 봐.”
그 순간, 나는 할머니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할 리가 없었다. _16~17쪽에서
〈전설의 뮤지컬 배우〉
“그가 어른이 되고 나서, 뮤지컬 한 편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된 거야. 무대에서 노래하던 배우들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 자신도 그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 하지만 그건 꾸어서는 안 될 꿈이었어. [중략]
어쨌든 꿈이 생겼으니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어. 음치를 고쳐 준다는 곳을 찾아다녔지.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병원과 음치 클리닉에 가도 소용이 없었어. 처음에는 다들 자신만만했지만, 결국엔 모두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데도 꿈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져만 가는 거야. 풍선처럼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계속 부풀어 올랐어.
그렇게 꿈이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릴 것 같던 어느 날,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야. 노래를 멋지게 잘 부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젊음까지 내어 줄 수 있다고, 신이 있다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주고 노래를 사고 싶다고. 그 정도로 간절했던 거지.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저 사람을 찾아온 거야. 사실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어. 잠자고 있던 방으로 찾아온 거니까. 검은색 중절모에 멋진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사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어.
그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지. 노래를 아주 잘 부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 대신 젊음을 가져가겠다고. 저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는 말에 그만 판단력을 잃고 그 제안을 수락했어. 그런데 그게 악마였던 거야.” _35~38쪽에서
〈사라진 운전자〉
“근데 너, 지금 저 차에 가 보고 싶지 않니? 차 안에 혹시 뭔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할머니가 주차장에 있는 차를 보았다.
“지금 말한 것들은 그냥 이야기일 뿐이잖아요. 일부러 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차에 가 보면 실제로 뭔가 있을 것만 같았다.
“맞아. 저기 있는 차는 현실이고, 네가 만든 건 그냥 이야기일 뿐이지.”
이야기가 그쯤에서 끝나 다행이었다. 그사이 맞은편 벤치에는 뮤지컬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전날과 같이 책을 들고 벤치에 앉아 발성하듯 목을 풀었다.
“혹시 저 할아버지, 아는 분이세요?”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여기 앉아 있을 때 몇 번 본 적은 있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대로 그건 우연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가 봐야겠다. 너한테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들었으니 오늘은 그걸로 충분해.”
할머니는 그렇게 벤치를 떠났다.
‘세상에 없던 이야기’,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한동안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볕이 나무 사이사이로 내려오고 간간이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다 흰색 자동차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흰색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차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는지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운전석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_59~61쪽에서
〈움직이는 나무〉
할머니는 벤치에 등을 기댄 채 두 팔을 쭉 펴고 하늘을 보았다.
“너도 해 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머니를 그대로 따라 했다.
“이렇게 누워서 천장을 보면서 생각하는 거야. 지금처럼 하늘을 봐도 좋고. 계속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십 분이면 충분해. 거실에도 많은 것이 있잖아. 의자나 탁자, 그리고 작은 화분 같은 거. 그런 물건들이 도움을 줄 거야.
예를 들어 의자라면……, 먼저 의자가 날아다니는 생각을 해 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러다 의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생각해 보는 거지. 의자가 어디서 왔을까? 갑자기 너희 집 거실로 뚝 떨어진 건 아니잖아. 분명 의자는 어떤 나무였을 테니까.
의자로 변신한 어떤 나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거야. 그리고 그 나무에 살았던 원숭이나 개미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거지. 이런 건 어떨까? 그 나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뭇잎을 몇 장이나 만들었을지 상상해 보는 거. 또 열매는 몇 개나 만들었을까? 또는 정확히 며칠을 살았을까?”
할머니가 하는 말들이 마치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서 장면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싹을 틔우고, 나뭇잎을 만들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_63~65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