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사람들은 이들 네덜란드인들을 불러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요? 강진에 내려갈 즈음에는 이미 이들 일행 중에는 조선말을 꽤 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문득 길고 긴 겨울밤 사랑채에 앉아서 아직 어눌한 조선말로 멀고 먼 바다 너머 네데를란트의 도시와 인도의 바다와 아프리카의 금빛 해변과 니우암스테르담의 깊은 숲에 대해 이야기하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큰 홍모인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는 상투 튼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봅니다. (12쪽)
여기 우두머리로 기록된 ‘ᄒᆡᆫ듥얌ᄉᆡᆫ’은 실제 원문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이름만 한글로 적혀 있습니다. 먼저 얘기한 유득공의 기록에는 이름을 언문, 그러니까 한글로 옮겨 적게 했다譯以諺
文는 얘기가 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제주에는 한글로 적어둔 이름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우두머리는 ᄒᆡᆫ듥얌ᄉᆡᆫ이고 배의 키를 잡는 장인인 기타공技舵工, 즉 항해사라고 하였는데, 이 ᄒᆡᆫ듥얌ᄉᆡᆫ이 한문으로 기록되면서 백계야음사이은이라고 옮겨 적혔습니다. 백계白鷄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흰닭’이라는 의미입니다. 어, 그러면! ᄒᆡᆫ듥을 흰닭으로 옮겨 적었던 것일까요. (33~34쪽)
읽어보면 뭔가 미묘하게도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알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이 이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멜은 이미 정례적으로 네덜란드인이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벨테브레이는 일본은 외국과의 교역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자칫하면 일본에 가려다 죽게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게다가 벨테브레이가 아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일행 간의 시차는 20년인데 어쩌면 전혀 다른 평행세계 속의 네덜란드인들 같지 않습니까? 17세기 제주도의 푸른 바다 너머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55쪽)
루쿠이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통해 열렬히 새로운 지식과 신앙을 퍼뜨리게 되고, 이에 관심을 갖고 호응한 유학자들이 마테오 리치를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설명드린 대로 루쿠이는 원래 중국 장난 지역의 유학자 네트워크 인사이더였고, 마테오 리치에게서 배우면 배울수록 이건 불교가 아니라 유학자의 접근법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래야 중국 사회의 상위 구조에 진입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합니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는 루쿠이의 인맥으로 명나라 유학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중국의 고전을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기존의 루지에리 방식의 불교를 차용한 접근법을 폐기하고 가톨릭 신앙과 중국 유학이 공존하는 방법을 고려하게 됩니다. (123쪽)
기리시탄이 완전히 금지된 이후 살아남은 기리시탄들 중에 신앙을 감추고 숨어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250년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며 숨어 지내다 19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다시 일본에 왔을 때 모습을 드러내어 세상을 깜짝 놀래켰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숨은 크리스천이라는 의미로 ‘가쿠레 기리시탄(隱れキリシタン 또는 隱れ切支丹)’이라고 부릅니다.
17세기 초반 에도 바쿠후가 안정되고 가톨릭을 금지하게 되기까지 주요 크리스천 지역은 역시 규슈와 교토 지역이어서, 대체로 서일본西日本의 상당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탄압이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추방과 단속 정도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금지의 수위가 폭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1630년대에 최악의 사태랄 수 있는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후 사실상 일본의 기독교는 ‘말살’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134쪽)
천주당이 자리를 잡은 지 4년이 지난 1605년 6월 25일에서 30일 사이의 어느 날, 마테오 리치에게 손님이 찾아옵니다. 마테오 리치는 이 노유학자 손님을 맞이하여 안으로 모신 다음 성상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의 상이 있었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자상이 있었으며, 4명의 성인상이 주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중국인 노유학자 역시 리치를 따라 무릎을 꿇고 예를 따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호난Honan의 카팜푸Chafamfu(후난성河南省 카이펑부開封府) 출신의 ‘응아이Ngai’라고 밝힌 진사 벼슬의 60대 노유학자는, 박사 자격을 위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왔다가 서양인이 도래하여 사원을 열었다는 글을 읽고 이들이 유일신을 믿는다고 하길래 어쩌면 자신들과 같은 종교인가 싶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리치는 처음에는 응아이가 혹시 중국에 일찍이 쿠빌라이 칸의 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독교인인가 하고 놀라 이야기를 하는데, 더더욱 놀라운 것이 응아이는 이스라엘인 즉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50쪽)
이러한 은의 유통과 은으로 거래나 세금을 지급하는 ‘은납銀納’의 흐름을 당연히 명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장려하지는 않았다지만, 이미 대세는 기존 지폐시스템의 심각한 평가절하에다가 복잡한 현물세제가 바뀌어가는 명 경제체제를 지탱하지 못하여, 1560년대 말경 결국은 장쥐정張居正이 건의한 새로운 조세제도가 장난을 중심으로 시행됩니다. 이 새 제도는 이름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 서구권에서는 영어로 ‘single whip tax reform’이라고 부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채찍질 한 번처럼 간단히 처리하는 개정 세법’ 정도? 처음에 이게 뭔가 하다가 보니 일조편법의 직역이더군요. 초간단 버전으로 말하자면 중국 땅을 측량해서 복잡다난한 각종 현물세를 모두 지세와 정세(인두세)로 일괄 적용해서 은으로 대납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전통적 해석이나 최근의 수정주의적 경제사 해석이나 할 것 없이 이 일조편법이 이후 거의 4세기에 이르도록 전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그럼 그 많은 은은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것이었을까요? (197~198쪽)
다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금-은 비율을 봅시다. 포토시에서 생산한 은을 스페인으로 가져와서 유럽 시장에서 유통시키는 것보다, 마닐라로 가져가서 이런저런 항해의 리스크 비용을 치르더라도 중국에 가져가면 산술적으로 대략 2배의 차익을 가져옵니다. 실제 17세기의 네덜란드가 동인도로 진출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 얀 하위헌 판 린스호턴Jan Huygen van Linschoten은 인도 고아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여기 인도 고아에서 중국이나 일본까지는 여기서 리스본으로 가는 거리만큼 되는데, 지금 제게 금화 200, 300두카트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바로 600, 700두카트가 됩니다”라고 이 상황을 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 차익의 기회가 스페인과 마카오-마닐라 및 마닐라-푸젠, 일본-마카오-포르투갈 라인들을 모두 일확천금의 광기로 몰고 간 것이라고 보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209쪽)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잡혔다 기리시탄이 되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필리핀으로 가 1617년 마닐라의 로사리오 기도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청년이, 그를 돌봐준 신부들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자신을 살린 그 신앙을 전하려고 저 험난한 남양 바다를 헤쳐 나가사키로 가 역경을 무릅쓰고 기어이 조선으로 돌아왔더라는 실화입니다. 이건 소설 아닙니다.
실은 이 사건의 조선 측 기록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는 1618년 광해 10년에 일본에서 고위 관직자의 아들을 송환했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617년에 제2차 회답겸쇄환사, 즉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조율하고 피로된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려는 조선 사신이 거의 반 년 넘게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미 난리가 나고 강산이 변해버린 시간 동안 살아남아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을 찾아서 데려온 일이 있었습니다. 1607년에 제1차 쇄환사가 있었고 1617년이 그다음 번 두 번째 쇄환사였습니다. (243~244쪽)
그리고 린스호턴의 『항해 일정』 책에는 ‘코레아’ 역시 등장합니다. 일본에 대한 설명을 길게 하고 난 다음 코레섬과 마카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야판의 약간 위쪽 34도 및 356도에 시나의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레섬Insula de Cor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섬에 대해서 그 크기나 인구 혹은 어떤 물산이 있는지 아직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라는 소략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서유럽 대항해시대의 기록 중에서 한국에 대해 설명한 첫 번째 기록이라고 현재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항해 일정』에 언급된 한국에 대한 정보는 28년 후에도 별로 업데이트 되지 않아서 제주에 표착한 벨테브레이는 심지어 코레아에서는 사람을 구워먹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315쪽)
에도 바쿠후는 이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고부터 전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통제를 시작합니다. 에도 바쿠후는 앞서 박지원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심지어 조선에도 혹시라도 기리시탄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협력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으로부터 거의 70년이 지난 1712년 신묘년 통신사행단의 임수간任守幹이 일본에서 수집하여 제출한 국제정세 보고서 『해외기문』에도 가톨릭의 추방과 시마바라의 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유명한 성상 밟기 ‘후미에踏み繪’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후미에는 십자가 성상이나 성모자상을 밟게 하여 숨어 있던 기리시탄을 적발하는 것인데, 유럽에서는 일본의 반기독교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여 『걸리버 여행기』에 에피소드가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326~327쪽)
그런데 말입니다. 덴지쿠 도쿠베에가 처음 항해를 할 때 그를 고용하였던 스미노쿠라 상단의 남만 무역선에 덴지쿠 도쿠베에처럼 서기가 되어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조선 사람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 2004년 진주의 강태중이라는 분이 집안에 전해오던 고문서들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그중 1634년에 제작된 진주 지역의 향안 한 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향안에 유학幼學, 즉 과거를 거치지 않은 선비 한 명이 꽤 상단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책에 등재된 인물 중에는 ‘진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잡혀가동남아 등지에서 거금을 모았다’는 조완벽趙完璧이 유학幼學으로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41~342쪽)
먼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네덜란드의 첫 번째 동아시아 진출 회사는 아닙니다. 디르크 ‘시나’ 폼프의 경우처럼 그 이전에 포르투갈의 배를 타고 동인도 바다에 도달한 네덜란드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배를 탈 수 없게 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생기기 전인 1594년부터 1602년 사이에 네덜란드에서는 포르콤파니voorcompagnie라는 회사들이 성행했습니다. 이때의 회사들은 자금을 모아 배와 실을 상품을 준비해서 먼바다에 나가 뭔가 더 귀중한 물건으로 바꿔오면 그 이익을 자기 지분만큼씩 배당받고 해체하는 형식인, 요즘의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유사한 형태의 회사 조직이었습니다. (388쪽)
그런데 네덜란드 배들은 문제가 좀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이미 강력한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진출해 있었단 말이죠. 잉글랜드는 그렇다 쳐도 네덜란드는 이들 이베리아 국가에게 전혀 다른 의미인 곳이죠. 일본이나 중국 당국에 ‘이들은 국왕도 없고 나라 자체도 사실 없는 사교(개신교)를 믿는 반란집단이다’라고 하면 얼마든지 팩트를 사용한 중상모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해 포르콤파니나 VOC 모두 다 실제 왕은 아니지만 스타트허우더를 맡고 있던 오라녜 공 마우리츠 왕자를 ‘홀란트의 왕’이라고 명기한 외교적 편지를 받아서 항해에 나섰습니다. (392쪽)
이 『황청직공도』로부터 40여 년 지난 18세기 후반에 재미있는 조선의 기록이 있습니다. 실은 조선시대에 외국에 표류한 기록들이 의외로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 제주도나 남해안에서 나가사키로 떠내려간 이야기는 꽤 있습니다. 홋카이도로 떠내려간 이지항李志恒 같은 사람의 경우도 상당히 예외긴 하지만 존재하고, 반대로 멀리 타이완까지 떠내려간 기록도 있습니다. 1796년 정조대에 타이완으로 떠내려갔다가 돌아온 이방익李邦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표류기가 정조에게 보고되어 연암 박지원의 손에서 한 편의 표류문학으로 정리되어 전해져옵니다. 이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라는 글에서 관련된 일부를 소개합니다. (452쪽)
그리고 일본 쪽에서 허용된 항구는 바로 전통적인 외국 무역항구인 나가사키였습니다. 에도 바쿠후는 본래 나가사키의 대외 무역을 보다 직속에 두고 통제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행해왔습니다. 이전 시기에는 좀더 자유로웠던 중국인들에 대해서도 1635년에 도진야시키唐人屋敷라고 불리는 중국인 통제구역으로 집중화시켜 통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쪽에서 교역을 허용하게 되니 자연스레 본격적으로 나가사키에 청 상인들이 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1688년 기록에는 그해 도항한 청인이 거의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나가사키라고 하면 네덜란드인들이 머물렀던 데지마出島가 가장 유명하지만, 실은 이 도진야시키를 통해 VOC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대청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히 비교를 하자면 데지마의 규모는 9000평방미터인 데 비해 도진야시키는 3만 1000평방미터였다고 합니다. (472~473쪽)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인삼’을 대단히 중요한 처방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실제 인삼을 사용한 처방전 자체가 『상한론』에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삼인데 문제는 일본에는 인삼이 자생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정보의 도입으로 수요는 생겼지만 공급은 없는 인삼이라는 코모디티commodity는 흥미롭게도 이리하여 조선을 동아시아 무역의 흐름에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제는 꽤 알려진 18세기 조선의 삼각무역, 즉 왜관을 통해 조선 인삼을 팔고 인삼 대금으로 받은 일본의 은이 조선 연행사를 통해 베이징으로 가서 실크로 바뀌는 삼각무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도 그사이 사회 경제적 안정을 되찾고 국제 네트워크에 다시 가담하는 18세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475~4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