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혼자 흘러가지 않았다. 마을에 집들도 세월만큼 낡아가고 마을의 주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평생 그렇게 살았듯이 있는 힘을 다해 농사를 지어 자식들 나눠주는 재미로 남은 기운마저 다 쏟아부었다. 이제 허리 아프고 무릎엔 인공관절 하나씩은 넣고 다니는 신세다. 스스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운 어르신들이 대부분 오래된 집을 지키고 있다.
오래된 집에 작정하고 달려든 쇳덩이에 집은 속수무책 맥없이 무너졌다. 트럭이 몇 차례 부산물들을 실어내고 흙을 실어다 넣고 평평하게 골랐다. 집터는 본디부터 그랬던 것처럼 돌담을 울타리 삼아 밭으로 변했다. 허물어지는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구경꾼들도 쓴 입맛을 다시며 바쁠 것 없이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허물어지는 집을 보며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싶어 할 일 없이 골목에 서서 어르신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날이다. -〈오래된 집〉 중에서
아버지는 새봄이 오면 마당 귀퉁이에 다독여뒀던 거름을 밭으로 나르셨다. 여름이면 붉은 고추가 마당 가득 햇빛을 받으며 더 붉어졌으며, 수확의 계절이 되면 논과 밭에서 곡식을 추수하여 마당을 거쳐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밤사이 눈이 소복이 내린 날, 그루잠에서 깨어 나가보면 어느새 아버지는 아침 일찍 숫눈길을 나가 말끔하게 눈을 쓸어내시어 마당엔 싸리비 자국만 선명했다.
그 해는 늦장마가 왔다. 며칠 내내 비가 그치지 않고 하늘이 뚫렸었다. 강물은 범람하여 집 앞 고추밭을 지나더니 마당을 넘실거리다 결국은 집을 앗아갔다. 두 번의 수해로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식솔을 이끄셨다. 늦둥이로 얻은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서라 하셨지만, 삶의 터전을 두 번이나 물이 잠기는 아픔을 겪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이제 집터도 흔적이 없다. 감나무라도 남아 있으면 좀 더 가늠하기 쉬울 터인데, 그저 큰 밭 안쪽 산 밑 여기쯤이 집터이고 바로 옆이 마당이라는 것을 가늠할 뿐, 지금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밭이 되었다. 그랬다. 마당은 우리 모두를 성장시켜 떠나보내고, 지금도 해마다 농작물을 길러내고 있었다.
그 땅이 밭이면 어떻고 마당이면 무엇이 다르랴. 이름만 다를 뿐, 언제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으니 그걸로 위안 삼는다. 발밑의 흙은 여전히 보드랍고, 그 속엔 할머니의 손길, 아버지의 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 있다.
마당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내 삶의 무대였던 마당은 기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자,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뿌리다. 이름이 바뀌어도,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그 흙 위에서, 나는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잃어버린 마당〉 중에서
밭을 둘러보던 중, 검게 늘어진 호박잎들 사이에서 덜 익은 큰 호박 하나를 발견하였다. 서리로 인해 줄기와 잎이 얼어버려 호박이 보호막을 잃은 채 홀로 남겨졌다. 마치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기온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애호박이라면 반찬으로, 늙은 호박이라면 호박죽으로 쓰일 수 있겠지만, 이 호박은 그도 저도 아닌 덩치만 큰 덜 익은 호박이었다. 짙은 녹색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묵직한 호박을 안고 집으로 가져왔다.
가을이 깊어가며 호박잎은 끊임없이 새순을 키워냈다. 아직 양분을 공급해야 할 열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명력은 보호해야 할 존재가 있을 때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문득, TV에서 본 손주를 키우는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노쇠한 몸으로 손주를 돌보며 폐지를 줍는 그의 삶은 고단했지만, 손주를 향한 사랑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나약함은 다르지 않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닮았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된서리를 맞을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오고, 삶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식물들이 된서리를 맞고도 땅속에서 다시 싹을 틔우듯, 우리도 그 멈춤을 견디고 나면 다시 봄이 찬란하게 찾아올 것이다.
서리 맞아 성장을 멈춘 식물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우리의 삶에도 멈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 멈춤은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서리 내린 날〉 중에서
내 삶에서 나는 주인공일 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 집에서는 부모님 뜻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로, 학교에서는 친구들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아이로 자리를 지켰다. 성향이 그러하다 보니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발전하여 조연쯤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그 조연이 싫지만은 않다. 지금도 이런저런 모임에서 앞에 나서는 일은 극히 드물다.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일은 맡지만, 되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협조하기를 좋아하고 그 편을 택하는 경우가 편하고 좋다.
미흡해도 주인공 역할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유년기에는 완고한 부모님 뜻에 따라 성장하다 보니 어설픈 주장도 펴지 못할 때도 있었으나, 성인이 되고 결혼 후에는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야 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육아에 힘써야 하고 바른길로 성장시켜 사회에 내보내는 책임이 부모 몫이니 소홀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인생 후반기에 들어 수필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은 부족하나마 주인공을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수려한 문장이나 명수필 한 편을 지어내지 못해도 내가 걸어온 길에서 보고, 듣고 느낀 생각을 나의 깜냥으로 펼치는 일이다. 내 삶의 주인 역할을 누구에게 대신 해 달라고 할 수 없으니 이 길에서 주인공은 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주인공도 있어야 하지만, 조연도 필요하다. 그 외에 잠깐 스쳐 가는 단역을 맡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조연의 역할이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작품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역할을 정말 맛깔나게 잘 소화하는 조연 덕분에 뜨는 드라마도 많지 않았던가.
손녀도 알게 될 터이다. 주인공이나 조연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놀이에서 언제나 주인공을 맡는 손녀도, 내가 조연 역할을 잘하는 적임자임을 잘 아는 듯하다.
오늘도 나는 조연이지만 열심히 역할을 해보리라. 조연의 자리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결코 작지 않으니까. -〈나는 오늘도 조연입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