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친분은 없지만 나는 그를 돕고 싶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모르면 몰랐지, 107호 남자의 심각한 상태를 뻔히 목격하고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그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건 아니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조금이라도 흥분감을 느끼거나 아드레날린이 분출해 심장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은 일절 없다. 그렇다고 딱히 내가 이타적인 사람이라서도 아니다. 내가 그를 돕는 행동은 인간 개체 수준에서 보면 이타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유전자를 가진 집단 수준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결국 내가 그를 돕고 싶은 건 그런 유전자의 본능일 것이다.
--- p.13, 그 남자 죽자 그 여자 살자 中
“그게 결국 빈틈인 거야.”
“빈틈이요?”
“봐봐. 이 영상을 봐도 처음에 누구 손에 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잖아.”
김 변호사는 거기까지 듣고 유 변호사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유 변호사가 다소 과장된 톤으로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피해자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피고인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늘 칼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피고인 이진영은 자신의 품에서 그 칼을 꺼내 박정호 씨의 목을 찔렀습니다……라고, 내가 검사라면 주장할 거란 말이지.”
--- p.123, 정당방위 中
주은에게는 홀아버지가 있는데, 그는 돈이란 단어만 들어도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딸이 결혼하기로 한 남자 집안이 돈깨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벌써부터 한몫 챙길 생각만 한다고 했다. 주은은 식도 올리기 전부터 속셈을 드러내 보이는 아버지를 없는 사람 치고 결혼하고 싶었지만, 되레 결혼 상대자인 진형이 그녀를 설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딸이 결혼하는데 사위 될 사람 얼굴을 아버지가 한 번쯤은 보아야 도리가 아니겠냐고. 진형의 거듭된 설득에 주은은 결국 그 뜻을 따르기로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속물근성이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시부모 될 사람들한테 그대로 보일 수는 없어 급히 대행을 구한다고 했다.
--- p.123, 대행 中
나는 생각합니다. 고로 완전한 좀비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른 좀비도 나와 같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그들 사이에 섞여 지켜본 결과 그들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건물 밖에서 큰 소리가 나면 사납게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그대로 불구가 되거나, 사람을 쫓는 길에 불길이 넘실거려도 그대로 통과하다가 온몸이 불탑니다. 좀비에게 물린 이후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진 나 역시 건물 밖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사람이 눈에 보이면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절로 흥분되지만, 창문 밖을 내려보기만 하거나 불길이 보이면 위험한 줄 알고 멈춥니다.
왜 나만 좀비가 됐으면서도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을까요?
--- p.181, 여기 백신이 있다! 中
“왜요? 왜 사모님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세요?”
“아내가 섹스 중에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요.”
박경민의 말에 코웃음을 친 성 실장이 이어 물었다.
“이름이 뭔데요?”
“동호.”
메모지에 이름을 받아 적으려던 영종이 이어진 박경민의 말에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준.”
“……둘이에요?”
“셋이요. 한 명은 외국인이에요. 피트였나.”
--- p.232, 역제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