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시대의 소음을 통과한 조용하고 투명한 울림
한국 시의 거목, 40년 시의 길을 걸어온
도종환이 건네는 ‘고요의 형식’
도종환의 시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래 고요를 잃은 시대에, 다시 한번 ‘고요로 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번 신작 시집 『고요로 가야겠다』는 도종환이 지금껏 펴낸 모든 시집 가운데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다정한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부드러움의 힘이 깃들어 있었지만, 이번 시집의 언어는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하고 따뜻하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가장 단단한 현실을 뚫고 피어난 온화한 결심이다. 세상과 눈 맞추며 살아온 한 인간의 목소리가 이제는 한결 조용하고 투명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외피가 돌처럼 딱딱한 벚나무에서 / 새로 솟아나는 연한 가지”(「부드러운 시간」)처럼, 그의 시는 고통을 밀고 나와 세상을 어루만지는 언어로 도달한다.
곽재구 시인은 추천사에서 정치와 시대의 소음을 통과한 시인이 이제 다시 ‘사람의 언어’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도종환이 난해한 정치판에 들어가 판을 향기롭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향기를 시로 돌려주는 일”이라며 그의 귀환을 축복한다. 나희덕 시인은 “이 시집의 화자들은 폭풍의 시절을 지나 고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도종환의 시가 “소음과 고요, 분노와 사랑, 격정과 지혜 사이에 선 언어”라며, 그가 오랜 시간 지켜온 인간의 진실을 다시금 환기시킨다고 썼다. 두 시인의 말처럼 『고요로 가야겠다』는 떠남이 아니라 귀환의 시집이다. 언어로 다듬은 마음의 집이자, 긴 시간의 혼탁을 통과한 끝에 얻은 ‘고요의 형식’이다.
고요의 끝에서
더 깊은 고요의 방향으로
생生으로 가야겠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고요로 가는 방식’부터 특별하다. 본문이 시작되면 ‘이월’이라는 제목이 백색 페이지 위에 단정히 놓이고, 맞은편은 새까맣게 닫혀 있다. 흰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첫 장면에서 시인은 이미 말없이 독자를 ‘명상의 문턱’으로 이끈다. 흰 페이지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여는 숨이고, 검은 페이지는 닫힘이 아니라 머묾의 공간이다. 첫 시가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를 때, 독자는 마치 선가의 방 안으로 들어간 듯한 감각에 잠긴다. 시는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한 행 한 행이 묵상처럼 독자를 붙잡고, 그 사이의 여백이 시 자체의 일부로 작용한다. 도종환은 산문적 속도에 지친 현대의 독자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한 문장에 오래 머물게 하는 고요의 방을 마련해준다.
이 시집은 기존의 4부 구성 대신 여덟 개의 ‘사유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월」, 「고요」, 「달팽이」, 「슬픔을 문지르다」, 「사랑해요」, 「당신의 동쪽」, 「손」, 「끝」으로 이어지는 여덟 개의 화두는 각각 하나의 명상적 공간을 연다. 시인은 각 부를 전시관처럼 배치해, 독자가 방과 방 사이를 거닐며 자신에게 가장 깊이 울리는 문장을 발견하도록 한다. 여백과 어둠, 문장과 침묵이 교차하는 이 구조 속에서 독자는 읽는 동시에 사유하고, 시를 감상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고요로 가야겠다』는 물리적 구성 자체가 하나의 시적 장치가 된 작품이다. 시집의 중심부에 자리한 시 「고요」는 이 여정을 집약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 고요로 가야겠다.” 이 간결한 선언은 시인이 도달한 내면의 결심이다.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고 세상을 다시 받아들이는 윤리적 태도이며, 도피가 아니라 회복이고, 침묵이 아니라 이해이다. 그가 이르는 고요는 외부의 소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소리 속에서 자신만의 호흡을 찾는 일이다.
“슬픔을 문지르면 분노가 덜 아프다”
필생畢生의 시, 인간으로 서는 언어
노지영 평론가는 해설에서 도종환의 시를 “사이로 향하는 필생의 시”라 명명한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극단을 넘어서, 분노와 용서, 현실과 영혼, 상처와 회복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 중심을 증언한다. 「슬픔을 문지르다」, 「두 손」, 「피」 같은 시에서 그는 몸의 감각으로 영혼의 진실을 말한다. “아침 햇살의 밝고 따스한 부분이 따라 들어와 / 고여 있는 슬픔의 기포를 툭툭 터뜨린다”(「슬픔을 문지르다」)는 구절은 언어로 치유의 몸짓을 실현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어서 “무엇보다 고요가 거기를 채우고 있는 정적이 좋았습니다”라는 고백은, 고통의 자리를 비워내어 고요로 채우는 치유의 완결을 드러낸다. 거칠고 사나운 세상 속에서 함께 버텨온 손들(「두 손」)을 어루만지며, 상처 입은 존재를 다독이는 따뜻한 윤리의 감각을 보여준다. 기도의 손을 통해 그는 고통을 견디는 연대와 회복의 순간을 노래한다.
시집의 말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몸이 회복되는가 보다 하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런 회복의 시간처럼 시도 내게 옵니다. 시는 마음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만난 언어입니다.” 절망과 상처를 통과한 언어만이 지닌 맑은 진술이다. 그의 시에서 희망은 마른 낙관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젖은 낙관이며 세상을 향한 다정한 응시이자 삶을 향한 마지막 결의다. “툭 하고 떨어지는 붉은 방울 / 젖은 낙관 하나”(「젖은 낙관」)라는 구절처럼, 희망은 고통을 통과한 언어의 흔적이다.
나희덕 시인이 말한 “시인의 고요가 잘 익어가면 좋겠다”는 말처럼, 『고요로 가야겠다』는 그 익은 고요의 기록이다. 그리고 곽재구 시인의 말처럼, “힘든 시절과 싸우는 벗들이여, 사랑하는 이와 나란히 앉아 도종환의 시집을 읽자.” 분노와 슬픔을 지나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는 길, 그 길의 이름이 바로 ‘고요’임을 도종환은 스스로의 언어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