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작가 사후에 발견된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 장편
마이크로그램의 정점
『도적』은 로베르트 발저가 1925년에 베른에서 집필한 소설로, 작가 사후인 1972년에 최초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초고는 발저가 몽당연필로 쓴 마이크로그램 원고 중 하나에 속한다. 이 원고는 독일어 필기체를 축소한 형태의 미세한 필체로 쓰여졌으며, 그 결과 『도적』의 전체 초고는 단 24쪽의 원고지에 모두 들어갔다. 이처럼 읽기 어려운 발저의 미세한 필체는 흔히 ‘암호문’이라고 불리곤 했다.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소설이 애초에 발저에 의해 출판을 의도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이 원고에는 제목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문학사에서 가장
깊고 난해한 작가가 그려낸
블랙 & 로맨틱 코미디
『도적』의 주인공은 보헤미안 기질을 지닌 한 무위도식자이자 무일푼의 작가로, 사회에 순응하지 못하고 또 그럴 의지도 없어 주변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조롱받는 인물이다. 그는 마주치는 여성마다 사랑에 빠져 ‘줏대 없는 인간’이라 불린다. 소설 속 화자는 이 ‘도적’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의뢰한 작가로서 도적의 삶을 기록한다. 줄거리만 보면 간단하지만 사실상 이 이야기는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진정한 핵심은 무수한 여담과, 무엇보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도적』의 진짜 주제라 할 수 있다.
“아, 보잘것없는 여자가
나의 전부였다면.”
도적은 한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후원자의 지원을 잃은 뒤 베른으로 돌아온다. 베른에서 그는 여관 주인의 도움을 받아 부분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가끔 사무실 잡일을 하며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과 만남을 갖지만, 언제나 피상적인 교류에 그친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정의 딸 반다에게, 그 다음에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인 에디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던 중 도적은 한 교회에서 ‘사랑’을 주제로 공개 강연을 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