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행복과 불행의 사이에 있는 그 수많은 것들이, 아니, 아예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닌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가 저렇게 되었을 때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 관념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내 몸과 마음으로 뼈에 사무치게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불안과 공포의 노예로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이분법에 대해서,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 일들에 대해서 쓰고 싶어졌다._Prologue
불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안다고 믿었던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과 같았다. 주변의 타인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과도 같았다. 40년도 더 산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게 되다니, 인생이란 얼마나 길고… 또 예측 불가능한가!_p.34
지금이야 남 얘기하듯 쓸 수 있지만, 그때는 우리도 걱정과 불안에 매일같이 밤잠을 설쳐야 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다음 달 가스요금을 못 내면 어떻게 하지? 밀린 국민연금은 또 어떻게 하지? 이렇게 살다가 아이들 대학 등록금마저 마련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 막막한 심정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 나를 뒤흔들어놓곤 한다. 가난은 첫사랑처럼 끝나지 않는다._p.59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든 이게 잘못된 선택은 아닐까, 더 나은 선택이 있는데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게 아닐까 불안해진다.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더 막막하다. 무엇이 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럴 시간에 저걸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저걸 하고 있을 시간에 그걸 하는 게 낫지 않을까? (…) 사실 내가 게으른 게 아니다. 삶이 너무 바쁘다. 근데 나 왜 이렇게 바쁘지? 해야 할 일은 왜 끝이 없지?_p.103
살림은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도돌이표다. 오늘 깨끗이 청소하고 빨아도 내일이면 다시 더러워진다. 아무리 정성껏 만든 요리도 결국 변기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살림은 그만큼 덧없다. (…) 그 덧없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한다. 매일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한다. 마치 오늘밤 죽고 내일 아침 다시 태어나는 사람처럼 한다. 이 덧없는 일이 나 자신을 지탱해줄 거라 믿으면서 한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굴러가는 이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그렇게 나만의 작고 견실한 세계를 쌓아올려나간다._p.106
밤에 맥도날드에서 디저트를 먹을 수 있고 아침에 맥모닝을 먹을 수 있는 인생. 꼭 맥도날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도 자주 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인생은 꽤 괜찮은 것 같다. 밤에 다디단 디저트를 먹어도 위험하지 않은 건강 상태, 맥도날드의 디저트와 맥모닝 정도는 가볍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상태, 그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작은 기쁨을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 상태. 그런 것을 모두 갖추기란 무척 어려운 일 같기도 하고 무척 쉬운 일 같기도 하다.
그날 우리는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입원 중인 시아버지를 병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_p.120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미래는 불안을 자초한다.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불안에서 풀려나면 다시 무모할 정도로 낙천적인 나로 돌아온다. 자 자, 지금까지도 넌 어떻게든 해왔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거야. (…) 그러니까 몸에 힘을 빼. 어깨를 펴. 숨을 깊게 들이쉬고 오래 내쉬어.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에, 시간에 너를 맡겨. 시간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려. 너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마치 파도에 몸을 맡기듯 거기에 몸을 맡겨._p.127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운동장으로 걸어간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을 바라본다. 한 바퀴 달릴 때마다 구름이 다른 모양을 만들고, 부드러운 초록 나뭇잎들이 바람에 차분하게 흔들린다. 저 멀리 서쪽에서 해가 지고 있다. 그래, 나는 이 모든 것들의 촘촘한 연결망 속에 존재한다. 이것들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미 기대고 있으니 더 적극적으로 기대도 된다는 것, 지금보다 더 무책임해져도 된다는 것,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 것._p.148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다.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고 싶다.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좋음에 대한 정의와 예시를 하나씩 모으다보면 내 삶은 자연스럽게 나만의 좋은 삶이 되어가지 않을까?_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