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물려받고, 무엇을 앞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학자로서, 혼혈인으로서, 저는 계보를 상상하는 방식과 거기에 깃든 편협함을 결코 신뢰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여기고, 어디부터를 ‘타자’로 분류하는지, 그런 경계에도 동의 하지 않았습니다. 북미에서는 DNA를 통해 과거와의 연결고리와 생물학적 기원,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욕망을 이해합니다. 기실 이 책을 움직이게 하는 힘 중 하나도 그런 욕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은 더 커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혈연중심적 외국인 혐오, 식민주의, 파시즘의 흐름을 마주하며, 세상이 우리에게 더 큰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14-15)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틀림없이 그의 딸이었을 때, 나는 작은 흰색 종이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용 약관이 딸려 있는 DNA 키트였다. 거기엔 개인 정보보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당사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본인 또는 가족에 대한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될 수 있으며, 이는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019년 1월 말, 나는 플라스틱 튜브에 침을 뱉고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p.46)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함축되는 애초의 수수께끼는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수수께끼는 더 넓게 퍼지고 더 뜨겁게 변화했다. 그의 이름은 더 많은 혼란과 단절, 비밀과 수치를 머금은 하나의 거대하고 부서진, 아름다운 가족 속으로 나를 던져놓았다. 가족의 비밀을 파헤쳐본 사람이라면 전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미가 수백 개의 알을 낳듯 비밀 하나가 또 다른 비밀들을 낳는 상황이, 한 개의 이름이 수없이 많은 이름들로 증식하는 방식이. (p.133)
어머니의 비밀을 다루는 이야기는 드물다. 나는 여성의 문란함에 따라붙는 고약한 도덕주의를 떼어내고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마음에 대해 더 알아내고 싶었다. 자라면서 보아온 옥죄인 마음이 아니라, 연인을 찾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p150)
엄마는 불완전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기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친 열기를 억누르지 않고 터뜨릴 줄 알았다. 외부에서 막아도, 내면에서 붙잡아도, 아픈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다. 엄마에겐 아주 뚜렷한 내면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백인들, 적어도 엄마보다 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무시했다. 그들에게 엄마는 그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별난 사람”이었다. (p.177-178)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올바른 질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로는 질문 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였다. 엄마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을 나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질문을 해도 몇 가지 사실은 알아낼 수 있을지언정 이야기의 핵심에 가닿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 내 질문들은 나를 더 멀리 밀어냈다. 우리가 손익 계산을 따지는 불편한 역할 속에서 대화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p.220)
식물을 엉뚱한 자리에 심으면, 정원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사정없이 일러준다. 정원은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통제하려 드는 강박을 비웃고, 그 어떤 순진한 유토피아적 충동도 거꾸로 뒤엎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종이와 잉크로 좁아진 나의 길을 벗어나는 우회로였다.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위험이 닥쳐올 때, 검은 흙에 담근 손이 닻이 되어줄 수 있다. 비록 인생에서 이토록 서툴러본 적이 없을지라도, 이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다. 구멍 하나에 오래도록 물을 붓다 보면, 서사는 가라앉는다. (p.228)
부모님의 이야기를 식물의 시간으로 상상한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단발적이고 모호한 존재인지, 인간 개개인의 활동이 얼마나 미미한 운명에 지나지 않는지,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나무들의 그림자 속으로 스러지고 속삭이는 풀밭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이 광활한 세상의 이야기 속에 얼마나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지. (p.236)
동화되는 것은 까다롭다. 눈에 띌 정도로 달라서 호감이 가고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이거나 괴롭힘을 “자초”할 만큼 너무 다르게 보이지는 말아야 한다. 가정 내에서는 반동화주의적이고 전통을 즐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정치적·사회적으로 통합된 존재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p.267)
우리는 모두 후성유전적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내 친구 M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조상들의 “살아 있는 콜라주”다. 우리는 감지하기 어려운 유령 습관과 몸짓, 공포증, 결점, 재능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유전은 단순히 다음 세대를 불행한 결말로 이끌거나 또는 그런 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아니다. 과거는 우리 몸속에 남아 지속되지만, 우리는 동시에 각자 고유한 존재이며, 지금 세계의 적확하고 특별한 일부이기도 하다. (p.279)
영향의 친족성은 매일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유산에 대해 쓴다는 것은, 글쓰기 자체를 유산으로 말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또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글쓰기는 내게 자식으로서의 짐이다. 거대한 감사의 꽃다발과도 같은 무게로 들어야만 하는. (p.391)
어느 밤, 엄마는 침대에서 쉬다가 불쑥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냥 뚝딱 죽었으면 좋겠지. 그 발언과 돌발성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아니야, 엄마. 나는 말한다. 난 엄마를 사랑해. 팔을 휘젓고 허공을 때리는 엄마를 향해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치 술 취한 신호병처럼 허공을 때리는 엄마. 나는 말하기를 멈춘다. 엄마의 팔도 멈추길 바라지만 오히려 갑자기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세게. 움켜쥔 손으로. 이제 엄마는 권투선수가 된다. 부드러움의 불씨를, 자기 그림자를 두들겨 없애는. (p.406-407)
사랑하는 딸, 이야기를 하나 줄게. 우리 행성이 태어나기도 전에, 흙을 이루는 입자들은 우주의 먹빛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사랑하는 딸,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줄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잊은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p.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