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의 표정은 나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한 바다의 색깔은 금빛 황혼에 젖은 아름다운 적색 바다였다만, 그가 생각하는 바다는, 그 표현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매를 맞고 나면 온몸에 저런 빛깔이 번지지.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피멍이 저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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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소 옆집에 살던 열다섯 된 여자애는 기총소사로 허벅지가 관통되어 피를 많이 흘리고 널부러져 있었다. 급히 지혈하려고 몸을 들어 보니 동맥이 끊어져서 지혈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이의 얼굴은 벌써 창백해져 있었다. 최선을 다해 지혈했으나 의사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는 동이 틀 무렵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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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미해군 제7함대가 마침내 인천에 상륙했다. 이어서 9월 16일부터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의 총반격이 개시되었고, 9월 28일에는 중앙청에 미군기가 펄럭였다. 단 열흘 사이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인민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다. 분주소 창문 밖에는 팔다리 머리에 붕대를 싸매고 패잔병처럼 후송되어 오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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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란 말을 듣고서야 왈현이는 움찔하더니, 볼우물에 엷은 웃음이 고인 눈가에 얼핏 물기가 반짝였다. 고운 뺨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한 장의 사진이 겹쳐져서 떠올랐다.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정된 모습이었다. 그 얼굴들, 그 얼굴은 늘 말이 없고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차려입은 정희의 얼굴이었다. 또 머리에 옥비녀를 꽂고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샛별이의 버들잎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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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남북을 왕래하며 공작을 진행하는 남로당원들을 많이 보아 왔었다. 그들은 공작 도중 사살되었거나, 체포되었어도 감옥에서 고생하다 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 처형되었다.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남한 경찰에 잡히면 일단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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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가장 격자임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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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 더디고 추웠다. 어느새 붉게 물든 황혼도 지고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늘 저 끝에서 북극성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려면 누군가 저 별처럼 빛을 밝혀야 한다.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이젠 완전히 딴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집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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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서 정강이까지 잠기는 눈길을 통해 산을 올랐다. 미인의 미끈한 다리를 연상시키는 하얀 자작나무 숲길을 헤치고 한 시간 동안 올라갔다. 마침내 산정에 오르자 눈 앞에 펼쳐진 천지, 말없이 누운 ‘하늘의 연못’이다. 천지를 둘러싸고 톱날 같은 봉우리들이 어둠 가운데 치솟아 있다. 그 봉우리들은 하나하나 위엄 있고 강인한 전사들처럼 우뚝 버티고 서있었다. 백암봉·천문봉·용문봉·지반봉·백운봉·옥주봉……. 인간으로서 이런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기 전에 여한이 남지 않을 정도였다. 수려한 산세에 눌려 감상에 빠질 즈음, 상상봉에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바람에 씻겨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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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인 생각하는 자유는 강제로 고쳐지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강요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여 인간의 내면을 황폐하게 하고 패배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말 자유 민주주의가 체제의 기본 원리인 사회라면 이런 ‘전향’이란 말 자체가 용납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사상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전향 공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남한 사회가 기형적인 군사 독재 체제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런 체제에서 사상적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과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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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족들의 고초를 덜어 주기 위해서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는 게 현명하다. 나야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지만, 가족들은 누구 하나 다치면 안 돼. 절대 안 돼! 이제까지 눈물 한 방울 없이 지내다가 고초를 겪고 있을 아내와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하고는 그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하늘이 빙빙 돌도록 어지러웠다. 나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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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만, 고등 법원은 내 사건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이어서 1972년 11월 3일에 대법원에서 문건심의로서 기각되어 나는 무기 징역이 확정되었다.
나의 한평생이 징역 생활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어금니를 질근 깨물었다. 감방 들창은 마지막 석양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