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테르가 견뎌야 하는 것들
김지숙
안녕? 어느새 장미꽃잎들 분분히 지는구나. 어떻게 지내는지….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얼마나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손 내밀었는지, 또 얼마나 환희에 찬 마음이었는지도. 너는 끝나지 않는 겨울 담벼락에 혼자 서 있던 사람. 밤의 어둠으로부터 누군가 와서 너를 데리고 어디로든 가주었으면 하던. 그런 너의 눈동자 속 장미가 그렇게 붉을 수가 없었지. 진정으로 무언가를 갈망하는 장미의 눈.
하지만 사랑은 결국 한 권의 책처럼 불타버리고 말았구나. 순수, 믿음, 약속, 이런 말들은 너무 쉽게 부서져 버리고, 갈피마다 푸르렀던 문장은 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사랑은 우리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녹여버리기도. 너는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기로 했을까?
그러나 넌 다시 사랑하게 될 거야. 사랑은 그런 거거든. 너의 영혼도, 너의 문장도 걱정하지 않아. 매번 무너지고 망가지는 그 폐허를 견디는 인내의 고투로부터 너의 사랑, 너의 자유, 너의 시가 다시 일어설 테니 말이야. 지금 네가 선택한 어둠과 고립과 침묵을 존중해. 네 그림자로 흠뻑 젖은 길, 그러나 네가 다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너의 걸음걸음을 믿어.
그날 밤 너와 함께 보았던 거기 키 큰 플라타너스가 베어졌더라. 무수한 너의 저녁과 묵음을 걸었다던 나무였는데…. 큰 그늘로 일렁이던 나무는 쓸쓸한 밑동으로만 남았지. 이 세계는 뭐든 가차 없지. 하지만 없애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있지. 너도 알잖아? 생의 우울과 불안도, 아름다운 플라타너스와 장미도 너는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거야. 너는 너의 가장 성실한 증인이기도 하므로. 무엇보다 잊지 마. 너의 영혼은 영원한 봄의 아이란 것을!
쥐똥나무에게
김형로
이름이 못마땅한 게지
내 그걸 모르겠니
굴참나무 아저씨에게 소식 들었느니라
엄마도 네 나이쯤 그런 생각 들었단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지은 이름이지만,
빛나던 이름 중 얼마나 독한 것 많더냐
이름 귀하다고 몸도 귀해지더냐
이름 꾹 눌러 겨울나면
꽃은 또 피고
네 향기 얼마나 그득하더냐
이름 고약한 떡갈 아저씨도 그러더라
쥐새끼 같은 놈, 쥐똥 같은 놈은 있어도 쥐똥나무 같은 놈은 없다고
네 향기 더욱 아름답게 한 건 쥐똥이라는 이름이라고
우리는 반전의 하이킥을 세상에 쏘아 올리는 것이니
보렴 가을날이면
가지 끝 까맣게 영그는 것
그것이 이름이 될 때
우린 쥐똥만큼 낮은 서원을 매단 것이니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보면
향기는 더욱 짙고 아름답게 물들어 갈 것 아니겠니
2025년 유월 쥐똥 꽃향기 속 에미가 보낸다
흔들려라, 청춘!
이은주
이 글은 너의 수레바퀴가 지나온 길, 지나갈 길, 그 길에 띄우는 대화야. 오래된 길의 궤적을 돌아다보는 일은 도래할 길을 위한 즐거운 여지이며 진중한 내포이지. 아침을 기다리며 마음을 비질하는 묵상이기도 해.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 너는 우리의 생을 노래했지. 시간의 비밀한 샘에서 익숙한 듯 낯선 혹은 낯선 듯 익숙한 청춘의 이야기를 길어냈지. 다정한 듯 냉혹한 혹은 붉은 듯 푸른, 청춘의 온도를 품은 음률을 새롭게 직조했지. 달콤쌉싸름한 사랑과 불안한 꿈과 은밀한 욕망이 파도치는 음률은 우리의 마음도 무대로 초대해 물결치게 했어.
너의 청춘은 여전히 촘촘하게 흔들려. 네가 그 흔들림을 설렘으로 노래할 때 햇살 가득 품은 잎사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듯해. 잎맥마다 숨그물이 잎맥마다 숨소리가 열심으로 노래하듯 너의 청춘이 단단히 흔들려서 안심이야.
너‘들’의 여전한 꿈을 응원하는 여구한 엄마‘들’이 보내는 이 기도도 너‘들’의 흔들림에 함께하길. 너‘들’의 흔들림이 서로 감응하길. 너‘들’의 천천한 걸음이 천천한 반짝임으로 오롯한 별이 되길 저녁을 마중하는 노을을 띄워 보낸다.
숲의 시간
정안나
화천은 편의점의 군인 우체국의 군인 걷는 군인 여기는 숲의 도시랍니다 하는 청년들이 숲을 입고 있더라
끝에서 끝을 향해 1박2일 달려와서 우리는 말을 잃어가고 더 이상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 이른 점심을 불러 모았지 중얼중얼 춘천막국수는 빠져나가고 서툴러서 서두르는 말은 빠뜨리고 말아 전해지는 마음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헹가래를 치다 서로 빠뜨린 곳
부대로 들어가는 외길은 차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더라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를 아이들이 너만의 일이 아니라며 이어졌지 끓어 넘치는 감정을 덮은 야구 모자는 교복 같은 흑백의 머리에 박혀 있어 창문으로 도망가는 줄담배에서 끓어오르는 연기는 살얼음, 살얼음
우리는 숲에서 눈 돌릴 수 없어 무명의 숲은 뿌리부터 달라 어떤 도피처도 결국은 숲으로 돌아가는 뿌리지 뿌리를 치른 수많은 무명의 그들이 있지 돌아온 거리에서 평생 우려먹는 술안주가 군대 이야기더라 지지 않고 그들의 자유가 되어 증명 되더라 숲의 시간은 미래의 자유가 되는 길이지만
코로나는 한번 안아줄 시간을 자르고 우리를 쫓아냈지 정신 차려보니 너는 없고 쏟아지는 길을 앞장서서 내려가고 있더라 네 뒷모습은 어찌나 큰지 집에까지 따라오고
학원에선 안 왔다하고 학원 간다고 나간 널 찾아 피시방으로 돌며 애걸복걸한 시간은 점잖게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지 일탈 할 곳도 찾아 나갈 수도 없는 곳에서 그때처럼 기다릴 숲의 시간
너는 군인에게 자식은 우리에게 맡기면서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