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수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간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의 외형은 변했지만 권력 투쟁과 권력의 행사라는 정치의 핵심적 관심사는 변하지 않았다. -16쪽
우리 시대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에서 혁명적 시대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극적이고 급진적 변화를 볼 수 있다. 안정적이고 익숙해 보였던 국제 체제는 이제 떠오르는 중국과 실지 회복을 노리는 러시아의 도전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24쪽
현대사는 과거와 폭넓고 근본적인 단절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중 일부는 계몽주의와 같은 지적인 것이었고, 다른 일부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세계는 1차, 2차, 3차, 그리고 현재 4차에 이르는 수많은 산업 혁명을 거쳤다. -25쪽
무엇이 한 시대를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혁명적 시대에 예측 가능한 다른 결말이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끝날까? 이 책에서 내가 답하고자 하는 몇 가지 질문이다. 나는 과거 혁명의 시대를 되돌아보고 혁명의 기원과 그 여파를 이해한 다음 현 시대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 한다. -32쪽
기술, 경제, 정체성이라는 이 세 가지 혁명적 힘은 거의 늘 반발과 역풍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그토록 많은 변화를 그렇게 빨리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낡은 정치는 때로 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새로운 연합을 찾는 등 변화에 적응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는 ‘개혁과 현대화’ 또는 ‘탄압과 반란’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결과가 결합된 폭발성 있는 조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7쪽
1588년 네덜란드 공화국the Dutch Republic(또는 연방이라고 알려짐)이 수립되면서 네덜란드는 약 200년간 지속된 성공적인 사회, 경제, 정치 질서를 만들어 냈고, 이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반열에 올랐다. -49쪽
경제 사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ison은 기술과 노동 생산성 면에서 세계의 선두 주자라는 기준에서 볼 때 “지난 4세기 동안 세계를 선도한 국가는 단 세 나라뿐이었다”라고 주장했다. 1890년경부터 그 선두 국가는 미국이었으며, 19세기 대부분의 기간은 영국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네덜란드가 최고의 주인공이었다”라고 매디슨은 주장했다. -50쪽
이 첫 번째 세계화 혁명은 그 후에 나타난 세계화 혁명과 마찬가지로 기술 혁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은 원주민보다 훨씬 뛰어난 해군 및 군사 기술을 자랑했다. 예를 들어 이들은 3~4개의 돛대에 500톤 이상의 적재 용량을 가진 대형 무장 상선과 함께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소형 범선을 발명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런 선박 제조 기술을 정확한 천문 항법과 결합하여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중국은 수 세기 전에 이미 첨단 해군 기술을 개발했지만, 1500년대 초에 이르러 이들 원양 항해용 함대를 모두 파괴하고 내륙 국가로 돌아섰다. 원양에서 유럽인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57쪽
스페인의 모델은 하향식 통치와 강력한 억압을 기반으로 했고, 무역보다는 영토 확장과 부의 착취에 더 중점을 두었다. 네덜란드 혁명의 승리는 낡은 힘의 논리가 경제적 기술적 정교함에 자리를 내어준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이러한 후자의 특성은 권력이 절대왕정의 궁정을 넘어 일반 시민에게로 분산된 사회에서 더욱 융성했다. -69쪽
사실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중심지로서 도시라는 개념 자체가 네덜란드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였다. 네덜란드는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이루었으며, 1622년에는 인구의 최대 56퍼센트가 중소 도시와 도회지에 거주했다. (반면에 한 세기가 지난 후 프랑스의 경우 그 수치는 8퍼센트에 불과했다.) 암스테르담은 무엇보다 무역과 투자로 이룬 상업적 부를 바탕으로, 증권거래소뿐 아니라 운하용 선박을 이용한 대중교통과 비교적 깨끗한 상수도,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세계 최초의 공공 가로등 시스템 등을 완비해서 최초의 근대적 도시로 변모했다. -76쪽
경제 사학자들은 인류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두 가지 ‘분화分化, divergence’를 이야기한다. 1600년대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룬 경제 기적을 ‘소분기Little Divergence’라고 하는데, 북해의 두 나라가 다른 유럽 국가가 겪고 있던 침체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킨다. 이후 19세기에 유럽의 경제적, 기술적, 지정학적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대분기Great Divergence’가 있었다. 대분기로 인해 서구 국가 대부분이 다른 지역의 국가들보다 앞서게 되었고, 전 세계 강대국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대분기는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영국이 주도했다. -109쪽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은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강요된 혁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 준다. 프랑스 지도자들은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국가에 하향식 법령을 통해 근대화와 계몽주의를 강요하려 했다. -123쪽
역사를 통틀어 우리는 포퓰리즘 독재자를 과소평가하는 보수주의 엘리트들을 여러 차례 보았다. 이들은 권력을 넘겨주지 않은 채 그를 단순한 허수아비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거의 항상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시에예스의 도움으로 정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곧 과거의 정치적 동업자들에게 등을 돌려 15년간의 독재 통치를 시작했고, 이후에는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는 제국주의적 통치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아마도 19세기 전체에서 가장 정력적이고 오만하며 야심 찬 인물이었을 것이다. -141쪽
개혁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와 경제 모델로 19세기 전 세계의 근대화 추진 세력에게 영감을 준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라 바로 영국이었다. 다시 한 번 홉스봄이 이를 가장 잘 표현했다. “(영국의) 산업 혁명이 (프랑스의) 정치 혁명을 삼켜 버렸다. –173쪽
영국의 인구는 자연 증가와 함께 기회를 찾아 영국으로 온 이민자로 인해 급격히 증가했다. 1801년 영국의 첫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가 1000만 명을 조금 넘었다. 한 세기 후 인구는 3배 이상 증가하여 3000만 명을 돌파했다. -182쪽
만연한 소비주의는 영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경향을 억누르는 데 거의 확실히 기여했다. 1950년대 미국의 중산층이 자동차를 사거나 TV를 보느라 공산주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처럼, 한 세기 전 영국인 대부분은 석탄 난로를 즐기고 싸구려 삼류 소설을 읽느라 혁명에 나설 틈이 없었다. -206쪽
루스벨트는 여러 면에서 갑자기 사회를 장악한 신흥 부유층 사업가의 허풍과 비윤리적 행동에 실망한 유럽의 귀족과 닮았다. 루스벨트 가문이 속했던 뉴욕의 구舊엘리트들 사이에서는 특권적 지위가 대중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동반한다는 집단적 이해가 존재했다. 이 계층의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파괴적 본질과 정부가 대중을 도와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254쪽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기술 가속화가 시작되었다. 2차 산업 혁명the Second Industrial Revolution으로 불리는 이 시기에는 사회의 주요 연료였던 석탄을 석유가 대체했고, 자동차가 철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1차 산업 혁명 당시 미국이 영국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면, 2차 산업 혁명에서 미국은 새로운 산업화의 진원지였다. 텍사스 간헐 유정의 거대한 검은 분수부터 대중적인 모델-T 자동차를 생산하는 디트로이트 공장의 윙윙거리는 소음과 정밀 기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256쪽
민주적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중 어느 것이 사회에 적합한 모델인가? 이 논쟁은 20세기가 끝날 무렵에 종결되었다. 공산주의는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치학자 셰리 버먼Sheri Berman의 주장처럼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중앙 집권적 국가 계획 경제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두 가지가 혼합된 형태로 이 싸움이 해결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날 선진 산업 국가는 모두 자본주의와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주장했던 대부분의 복지 국가 제도를 결합하고 있다. –262쪽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농사, 순례, 정복, 상거래, 관광 등 다양한 목적으로 새로운 땅, 사람, 시장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19세기에 산업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전 세계가 실질적으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모험가는 오랫동안 영광과 부를 찾아 바다를 누볐지만,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글로벌 공급망이 국지적 무역을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271쪽
테러리즘이 정치적 의사 표현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1878년부터 서구 세계 전역에서 유명인사에 대한 암살 및 암살 미수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1892년부터 1901년까지 오스트리아 황후, 이탈리아 국왕, 스페인 총리, 프랑스와 미국 대통령 등 5명의 군주 또는 국가원수가 암살당했다. 역사가는 나중에 이 시기를 “암살의 10년”이라고 부르게 된다. -278쪽
전 세계에서 1억 명이 페이스북Facebook을 사용하게 되기까지는 거의 4년이 걸렸으나, 인스타그램Instagram에서 같은 수치를 달성하는 데는 2년이 조금 넘게 걸렸으며,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챗GPT가 사용자 1억 명을 확보하는 데는 단 2개월이 걸렸다. -325쪽
‘큰 정부 대 작은 정부’의 논쟁에 초점을 맞추었던 기존의 좌우 대립은 이제 존엄성, 지위, 존중 등에 대한 논점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우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 정의를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369쪽
1960년대와 1970년대는 20세기 들어 가장 빠르고 급진적인 정체성 혁명을 겪었다. 1968년 서구 세계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이 가져온 전후의 경제 호황 덕분에 전환점을 맞이했다. 전쟁과 기아의 공포를 겪지 않고 성인이 된 젊은이는 기성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개인의 권리와 시민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비전, 그리고 역사적으로 소외된 사람에게까지 확대된 시민권을 염원했다. -376쪽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중도 세력은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는 경제 정책에는 견해가 달랐지만 유럽 통합과 이민 확대를 지지하는 데 일치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통합과 이민이 가속화되면서 이러한 합의는 깨졌다. 역사적으로 내려온 좌우 분열은 무역이나 이민 같은 사안에 개방적 정치와 폐쇄적 정치 사이의 새로운 분열로 대체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보호 무역주의가 부상하고 급격한 기술 변화의 시기에 신러다이트 운동neo-Luddism이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스트 민족주의는 새로운 불안감을 이용해 정체성 혁명으로부터 동력을 끌어냈다. 이러한 포퓰리즘이 정치의 주류로 스며들면서 전통적 계급 구분이 무너졌다. -408쪽
정당 소속감이 개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이제 정당을 바꾸는 것은 자신의 부족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417쪽
첫 번째는 15세기부터 시작된 유럽 국가의 부상이었다. 이 혁명은 상업과 자본주의, 세계 무역과 강대국 외교, 과학과 산업에서의 혁명 등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계를 만들어 냈다. 이는 또한 서구 세계 국가의 장기적 우위와 전 세계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의 식민지화 및 피지배로 이어졌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두 번째 거대한 패권 이동은 미국의 부상이었다. -431쪽
우리는 탈미국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했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로, 전 세계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는 그다음 순위 국가인 중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점유율은 2008년 이후에도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다른 국가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회복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미국은 그다음 상위 10개국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한다. -446쪽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은 이전의 미미한 국제적 위상을 결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과 달리 중국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지 않았고,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의 제약도 받지 않았다. 중국이 경제의 주요 부문을 장악하고 해당 분야에서 대부분 자급자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시 주석의 ‘메이드 인 차이나 2025Made in China 2025’(중국제조中國製造 2025의 영문 표기_옮긴이) 발표는 트럼프의 관세 부과 조치와 바이든의 기술 이전 금지 조치가 있기 훨씬 전인 2015년에 나왔다. -463쪽
이 책의 주제는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 즉 진보와 그에 대한 반발이다. 여기에 소개된 네덜란드, 영국, 미국의 사례처럼 지속적 번영을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혁명조차 심각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의 실패는 급진적 변화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대판 보수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486쪽
남아 있는 가장 큰 과제는 그 여정에 도덕적 의미를 불어넣고, 한때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자부심과 목적의식을 부여하여 마음의 빈 구멍을 메우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 같은 곳에서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나 파시스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종교, 전통, 공동체와 같은 사회의 오래된 요소가 변화의 폭풍 속에서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하는 평형수平衡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5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