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속에서
천둥 울고 번개 쳐서 땅 꺼지는 그런 날, 천둥 속에… 번개 속에… 아우성 그에 묻혀 숯검정 몰골을 하고 저리 뛰고 이리 구르다가
그대여 혹시, 그대여 돌아설 곳 없거들랑 우리 서로 눈 맞춰 도망이나 갈까나 돌 같은 애 하나 낳고 살까나 그냥, 그냥
돌비알 짊어지고 발 하나 흙에 묻어 꽃 나든지 풀 나든지 썩어 거름 되던지 살까나 그래도 된다면, 천둥처럼 천둥 속에서
-P13
꽃이 핀다
앵돌아져 비켜앉은 새침데기 고 가시내
옴서감서 곁눈질로 슬쩍, 스을쩍
그러다 눈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어쩌까
분 내음 같은 것이 그립고 애틋한 것이
미어지게 차오르는 아, 그래서 못살겠는
널 뛰는 가슴팍에다 불 지르고 딴청이라
이래도 되나 몰라 언감생심 품은 뒤로
상사想思의 병病을 얻어 이레쯤 앓고 나서
꽃 지게 지고 가다가 왈칵 쏟은 개울가에
-P14
끈
그러니까 너는 내게 한 가닥 끈이었다
당기면 스르르 풀리고 마는 끈
느슨한 혹은 팽팽한, 가끔씩은 풀리지 않는
산으로 바다로 끈 떨어진 신세였다가
저물녘 처마에 걸린 불빛 같은 눈빛이다가
다시금 잇대어보는 멀어진 거리만큼
-P24
상춘賞春·2
‒장미원에서
오랜 길 걸어도 그대에게 닿지 못하네
높고 낮은 굴곡을 건너와서 늦어버린
그렇게 깊은 세상을 이렇게 외오 서서
놓아버리고 빈손이더니 아무래도 젖은 심사心思
그대 그 앞가슴 같은 꽃의 떨림이 남아
붉어진 마음 건들어 화악! 끼치던 내음이여
여기 보아, 저 보아라고 꽃이 나를 불러
꽃이 나를 보고 나는 또 꽃을 보며
온종일 황망한 눈빛 저물도록 아득한 눈빛
-P25
붓
먹물이 번지는 길의 시간이다
우모牛毛든 서수필鼠鬚筆이든 갈근葛根이든, 그을린 부지깽이 또는 깨물어 낸 손가락으로 이 땅에 휘갈겨 쓴 몸은 한 자루 붓이었다 닳고 닳은 붓 한 자루가 세상을 갈고 닦았던 도구였다 바람이 몸을 펼쳐 넘긴다 쓰다가 지운, 물에 쓸려 읽을 수 없는, 삐뚤빼뚤 갈지자로 걸어와 여백으로 남은 사람
난봉꾼 잡설일지라도 한 권 책이었다
-P32
만유인력
길이란 몸을 사과껍질처럼 깎아놓은 것이다 단단해지기도 전에 내던져져 과즙을 흘리며 말라비틀어져서 흙인지 땀인지 범벅으로 쇠똥구리 마냥 데굴데굴
순응하며 흘러온 강가에 묵묵부답으로 앉아 청태靑苔를 기르다가 먼 하늘로 옮기던 그 눈빛 그 숨결 꽃에게 주고 나무에게 주고 들녘 바람 흉흉해질 때 배곯은 것들에게 나눠주고 난 뒤 파다한 노을 속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일, 울울만산鬱鬱萬山 첩첩疊疊 바다 헤쳐 건너 몸속 구석구석 쏟아내어 되돌려 주는 일, 지나온 곳을 지도로 그려 다른 이의 앞을 밝혀주는 일, 그런 것이 소임이라면 족하다 할 것이지만 하늘땅 그 고저가 너무 멀어라 온 힘 다해 움켜쥐어도 놓치고 말아
외마디 탄성도 없이
낙과가 되어 낙수 되어
-P47
마음 한 평
등에 내린 무게가 달빛 별빛은 아닐 터, 창고에 쌓인 것이 돌무더기는 아닐 터, 도중에 주저앉은 것이 풀잎만은 아닐 터
곁가지로 자란 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흔든다
가까워졌을까? 오래 걸었으니, 늙은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난다 금목서金木犀 향기에도 홍루紅淚를 본 듯 미어지는 소슬한 나이, 일월日月을 스친 것들은 말없이 한숨 깊어져 발걸음이 무겁다 목숨은 도둑 같아서 못다 고한 죄 같아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허허벌판에 툭! 떨어진 돌멩이 같더라 풀씨처럼 날리는 뜬소문…. 하늘을 살핀 적 없고 이 땅을 굽어본 적 없어 천리天理가 왔다 해도 불민하여 몰랐고, 몰라서 헛되어 욕스러워도 덤덤하였다 연륜이란 얼마나 노련한 것인가 염치와 부끄러움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눈 감고 귀 막고 입닫은 냉가슴 속을 일진광풍으로 휘몰아쳐 와서 뒤란의 대숲이나 흔들다 마는 것이었구나 노도怒濤를 달래며 그저, 먼 구름 곁에 그대 있어 무작정 걸었음이라
미망迷妄의 골짜기더냐
다 건너지 못하였으니
-P48
세량지에서
떠나서 잊어진다면 날마다 걸었으리라
소리쳐서 비워진다면 쑥국 쑥국 울었으리라
그래서 살아진다면, 어디서든 어떡해서든
딸깍발이 절뚝거리는 멀고 먼 이 지상을
오는 것이니, 떠나가서 저며 저며 오는 것이니
몸이야 던져진 채로 마음 부려 가는 것
꽃그늘 산그늘 물빛도 깊은 하늘
놓아버리고 잃어버리고 갈 수가 없다 갈 곳 없이
세량지* 잠긴 길 위에 풍경으로 서 있다
-P85